[시민기자 북클럽 3기] 인생이 게임이라면 제일 중요한 건

김현진 2023. 10. 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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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중심으로 한 우정과 사랑 그린 소설 <내일 또 내일>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편집자말>

[김현진 기자]

얼마 전 남편이 아이패드에 새로운 게임을 다운받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와 플레이 하기 위해서였다. 게임이라면 질색인 내겐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부모라면 아이가 게임에 노출되지 않도록 막는 게 더 필요하지 않은가.  

남편의 의견은 달랐다. 아이와 공유할 수 있는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게임은 아빠와 할 수 있는 놀이 중 하나고 같이 플레이하는 경험이 아이와의 애착 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거라고. 굳이 게임이어야 하나 못마땅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만큼 관계를 돈독하게 해주는 건 없다는 데엔 공감한다.

게임 좋아하는 남편에게는 딸과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좋은 친구란 어떤 사람인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해 주는 사람,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단번에 알아채주는 사람이니까. 

게임 좋아하는 당신에게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
 
▲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책을 덮고 나면 인생도 게임같다는 생각이 든다
ⓒ 김현진
 
교통사고로 발이 산산조각 난 열 살 샘은 엄청난 고통을 견디느라 말을 잊었다. 언니 앨리스가 백혈병으로 입원한 사이 가족의 관심 밖인 세이디는 끼니도 거른 채 병동을 배회한다. 병원 휴게 오락실에서 만난 두 꼬마는 게임을 하면서 자연스레 친해진다. 어린 나이에 맞닥뜨린 우울하고 슬픈 시간을 게임과 우정으로 견뎌낸다.

그랬던 이들이 대학생이 되어 재회하고 게임 회사를 차리며 겪는 우여곡절이 소설 <내일 또 내일 또 내일>(개브리얼 제빈, 엄일녀 옮김, 문학동네)의 줄거리다. 유년기 관심사를 공유했던 친구들이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일을 거쳐 미움과 상실, 실패를 통과하는 성장통이 담겨 있다.

한때 게임에 열렬했던 사람들에게, 혹은 여전히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 소설은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다양한 게임이 등장해 그 자체로 반가운 추억 읽기가 될 테니까.

게임을 잘 모르는 독자에겐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한 세계를 구축해 가는 청춘의 이야기로 흥미로울 테고. 이 경우 '게임'은 친밀한 두 사람이 공유했던 즐거움의 대상으로, 무엇으로든 얼마든지 바꿔 읽을 수 있다. 
 
"그냥 네가 곁에 있다는 걸 알려줘. 가능하다면 과자나 책이나 볼만한 영화 같은 걸 갖다주고. 우정이란." 마크스가 말했다. "일종의 다마고치 키우기 같은 거거든." - 99쪽 
 
소설을 읽는 동안 주의 깊게 보았던 부분은 주인공들이 우정과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이다. 교통사고로 엄청난 수술을 받고 말을 잃은 샘을 구해준 건 609시간 동안 게임을 같이 해준 세이디였다. 심각한 우울에 빠진 세이디를 이불 밖으로 끌어낸 건 날마다 그녀를 찾아간 샘이었고.

세이디는 병원에 장시간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샘의 불운한 과거를 캐묻지 않았고 샘은 세이디에게 병원을 가라고 조언하거나 가족에게 연락하는 월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가까워지기 위해 선을 넘거나 섣불리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말없이 함께 있어주는 일이 내겐 상대방의 어려움과 곤란을 공감하는 속 깊은 배려로 보였다.

대신 이들은 소소한 즐거움으로 상대가 회복의 시간을 갖게 도왔다. 힘든 시기를 통과할 수 있다고 상대를 믿으며 기다려주었다. 곁을 내어주고 삶을 나누는 것은 사소한 행위를 함께 반복하는 일이다.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는 것처럼. 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게임을 하는 것처럼.

의미 있는 일을 해야만 관계의 깊이가 돈독해지는 건 아니다. 가볍고 흔한 일에서도 변함없는 배려와 존중이 쌓여 깊고 끈질긴 관계의 토대가 된다. 인생과 관계에서는 결코 하찮은 일도 의미 없는 것도 없다고 소설은 속삭여준다.  

휴게오락실에서의 게임으로 아픈 상처를 들춰내지 않고도 서로에게 버팀목이 된 샘과 세이디. 좋아하는 게임을 공동 창작하며 서로의 삶에 든든한 존재로 남은 샘과 세이디. 시간이 쌓인 만큼 애정이 도타워진 관계는 고난의 시기에 그들을 버티게 해줄 힘이 된다. 인생에서 그런 친구를 만나는 행운은 흔치 않다. 그런 관계를 위해 정성과 시간을 들이는 일은 그래서 가치있다.    

책을 읽고 나서 게임을 하는 남편과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조금 달라졌다. 자신의 캐릭터를 꾸미고 싶어 두 눈을 반짝이는 아이의 기쁨이 새롭게 보였다. 지나치게 빠지지 않는다면 남편과 아이가 쌓는 공감대가 두 사람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소설 속 샘과 세이디처럼 두 사람 사이에만 허용되는 비밀 통로를 짓고 있는 중일지도.

인생이라는 게임을 함께 플레이하는 사람들

영문학을 전공한 작가 개브리얼 제빈은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자연스럽게 배치해 두었다. 적재적소에 유능하게 활용된 문학적 요소는 소설에서 다루는 놀이와 게임이 문학과 창작에 대한 메타포임을 짐작하게 한다.

샘과 세이디는 게임 창작자이지만 한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 예술가라 불리는 이들과 닮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작품을 만들고 싶지만 대중의 흥미와 사랑 또한 고려해야 하는 작업. 그 안에서 거듭되는 고민과 실패는 글을 쓰는 내게도 친근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영구히 갓난 상태 그대로의 다정한 부분은, 기꺼이 놀고자 하는 의지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사람을 절망에서 구원하는 것은, 기꺼이 놀고자 하는 의지일지도 몰랐다. - 620쪽
 
책을 덮고 나면 인생도 게임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도하고 플레이하고, 종료. 다시 또 시도하고 플레이하고 종료. 무한한 시도의 반복. 인생이 게임이라면 같이 놀 사람을 찾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지.

우정과 사랑에는 위험과 손해가 따라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다시 같이 놀고 싶어지는 사람,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인생이라는 위험천만한 게임도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와 함께라면 내일 또 내일 또 내일로 한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group 》 시민기자 북클럽 3기 : https://omn.kr/group/bookclub_03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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