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계약서에 '근로자 아님' 명시한 '고용 의사' 근로자성 인정

최석진 2023. 10. 8.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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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성 계약 형식 아닌 실질적 근로 내용으로 판단해야"
"구체적·개별적 지휘·감독 없었던 건 의사의 진료업무특성 탓"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관계법과 관련한 부당한 청구를 하지 않겠다'고 명시된 계약서에 서명한 고용 의사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근로 내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모 의료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서울 중랑구 소재 한 의원의 대표 이모씨가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북부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은 그 판시와 같은 이유만으로 오씨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봐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로 판단했는바, 이러한 원심의 판단에는 근로자성에 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이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2019년 7월 31일까지 근무하다 퇴직한 의사 오모씨의 퇴직금 1400여만원을 퇴직일로부터 14일 이내에 지급하지 않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에서는 오씨를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됐다.

이씨는 오씨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게는 퇴직금 지급의무가 없고, 퇴직금 미지급에 대한 고의도 없다고 주장했다.

오씨는 이씨와 근로계약서가 아닌 위탁계약을 체결했다. 오씨가 이씨로부터 위탁받은 진료업무를 이행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계약서에는 '오씨는 근로자가 아니므로 노동관계법과 관련한 부당한 청구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1심은 이씨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비록 계약서상 근로자가 아니라고 명시돼 있지만, 근로자성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아니라 실질적인 근로 내용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입장에 따라 따져볼 때 오씨를 충분히 근로자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오씨가 퇴직하기 직전년도인 2018년 오씨에 대해 근로소득세 원천징수를 한 점이나 오씨가 이씨가 운영하는 의원을 사업장으로 건강보험에 가입돼 있는 점 등이 근거가 됐다.

그런데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이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이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만으로는 오씨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라며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따라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두 사람 사이에 체결한 위탁계약서에 오씨가 근로자가 아니라는 점이 명시돼 있는 점 ▲오씨에 대한 취업규칙이나 복무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았던 점 ▲실제 오씨가 자신의 진료업무 수행과 관련해 이씨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감독을 받은 사실이 없는 점(계약서에는 '오씨는 진료업무에 대해 본인의 재량에 따라 성심성의껏 처리하고, 이씨는 오씨의 업무수행에 대해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 보고의무 등에 대한 요청 외에 별도의 직접적, 구체적인 지시명령을 행하지 아니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음) ▲오씨는 병원의 다른 직원들과 달리 지문인식기를 통해 출퇴근시간을 기록하지 않았고 직원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던 점 ▲오씨에 대한 연차 등 휴가규정은 따로 없었고, 오씨가 휴가로 진료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 이씨가 직접 대체의사를 구해 그로 하여금 진료업무를 대행하게 했던 점 ▲계약서에는 오씨가 이씨로부터 매월 600만원의 보수를 지급받도록 돼 있지만, 영업이익에 적자가 발생해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 현저히 어려울 경우 양측이 협의해 보수를 조정하거나 지급기일을 연기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는 점 등을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대법원에서 다시 결론이 뒤집혔다.

재판부는 먼저 근로자성 판단 기준에 대한 종래 대법원의 입장을 확인했다.

앞서 대법원은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계약의 형식이 고용계약인지 도급계약인지보다 그 실질에 비춰 근로자가 사업 또는 사업장에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했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해야 하고, 여기에서 종속적인 관계가 있는지 여부는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취업규칙 또는 복무(인사)규정 등의 적용을 받으며 업무 수행 과정에서 사용자가 상당한 지휘·감독을 하는지,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근무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자가 이에 구속을 받는지, 노무제공자가 스스로 비품·원자재나 작업도구 등을 소유하거나 제3자를 고용해 업무를 대행케 하는 등 독립해 자신의 계산으로 사업을 영위할 수 있는지, 노무 제공을 통한 이윤의 창출과 손실의 초래 등 위험을 스스로 안고 있는지, 보수의 성격이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인지,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및 근로소득세의 원천징수 여부 등 보수에 관한 사항, 근로 제공 관계의 계속성과 사용자에 대한 전속성의 유무와 그 정도,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법령에서 근로자로서 지위를 인정받는지 등의 경제적·사회적 여러 조건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또 "다만, 기본급이나 고정급이 정해졌는지, 근로소득세를 원천징수했는지, 사회보장제도에 관해 근로자로 인정받는지 등의 사정은 사용자가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근로자성을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도 밝혔다.

그리고 대법원은 이씨가 오씨와 위와 같은 내용의 위탁계약을 체결하게 된 배경을 짚었다.

조합 대표자였던 이씨는 2012년 4월부터 이 사건 의원을 개설해 운영하다가 당시 근무하던 의사 A씨게 임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아 2013년 4월 근로기준법위반죄로 벌금 200만원의 약식명령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이씨는 A씨가 근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식재판을 청구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벌금 200만원 형을 확정받았다.

이후 이씨는 공인노무사의 도움을 받아 위탁진료계약 형식의 계약서를 제공받아 노무관계를 해결해 왔고, 2017년 8월 1일 오씨와도 위탁계약을 체결한 것이었다. 계약 내용은 오씨가 이씨의 의원에서 진료업무를 수행하고 매월 600만원 및 현금 135만원을 받는 내용이었다.

재판부는 "오씨는 이 사건 의원의 유일한 의사로 근무시간이 일정하게 정해져 있었고, 근무 장소도 진료실(원장실)로 특정돼 있었다"라며 "이 사건 계약의 형식이 위탁진료계약이라고 하더라도 이 사건 계약 내용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씨가 정해진 시간 동안 이 사건 의원에서 진료업무를 수행하고 이씨는 오씨에게 그 대가를 고정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또 재판부는 "오씨는 주중 및 토요일 대부분을 이 사건 의원에서 근무하면서 매월 진료업무 수행의 현황이나 실적을 이씨에게 보고해야 했으므로, 이씨는 오씨의 근무시간 및 근무장소를 관리하고 오씨의 업무에 대해 상당한 지휘·감독을 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실제 두 사람이 체결한 계약서에는 오씨가 매월 한 차례 상호 조정 하에 진료업무 수행의 현황 및 실적을 이씨에게 통지해야 했고, 오씨가 보고의무를 게을리하거나 불성실하게 행한 경우 이씨가 이 사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재판부는 "오씨는 이씨가 제공하는 의료장비나 사무기기를 활용해 진료업무를 수행했고 이씨로부터는 환자 치료실적에 따른 급여의 변동 없이 매월 고정적으로 돈을 받았으므로, 오씨가 지급받은 돈은 근로 자체의 대상적 성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밖에도 재판부는 이씨의 의원을 사업장으로 오씨의 건강보험 가입신고가 돼 있었던 점도 오씨를 근로자로 봐야 할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이와 같은 사정들을 종합하면 오씨는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한 근로기준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한편 재판부는 오씨가 이씨로부터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받지 않았던 것과 관련해 "오씨가 비록 진료업무 수행 과정에서 이씨로부터 구체적, 개별적인 지휘·감독을 받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나 이는 의사의 진료업무특성에 따른 것이어서 오씨의 근로자성을 판단할 결정적인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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