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軍 4명 숨진 끔찍 추락…'조별과제의 저주' 그 헬기 결국 [이철재의 밀담]

이철재 2023. 10. 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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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말스 호주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육군의 MRH90 타이판(Taipan) 기동헬기를 더 운항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MRH90은 유럽 NH인더스트리즈의 NH90 다목적 헬기를 호주 현지에서 생산한 것이다. 국내에선 ‘농협(NH) 헬기’라는 애칭으로 잘 알려졌다.

지난달 퇴역이 확정된 호주군의 MRH90 타이판 기동헬기. 사진 호주 국방부


호주는 모두 46대의 MRH90(NH90)을 보유하고 있었다. 호주 육군에 40대, 호주 해군에 6대가 각각 배치됐다. 원래 퇴역 일정은 2037년이었다. 14년 빨리 물러나는 셈이다.

지난 7월 28일 호주가 주도하는 다국적 훈련인 탈리스만 세이버(Talisman Sabre) 중 호주 육군의 NH90이 추락해 승무원 4명이 숨졌다. 지난 3월에도 호주 육군의 NH90이 떨어졌다. 1년 사이 2차례 사고였다.

호주군은 미국의 UH-60M 블랙호크를 긴급 대체 수단으로 선택했고, 지난 8월 3대를 전달받았다. 앞으로 UH-60M 40대가 NH90 46대의 임무를 이어받을 계획이다.

한때 국내 밀리터리 매니어들 사이에 뛰어난 헬기라고 평가받던 NH90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NH90의 조기 퇴역은 조별과제의 저주

NH90은 ‘조별과제’의 또 다른 저주 사례다. 조별 과제(組別課題)는 대학교이나 중ㆍ고등학교에서 2명 이상의 학생이 조를 짜 함께 수행하는 과제다. 여럿이 힘을 합하면 개인보다 더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게 ‘이상’이다.

함 갑판 위의 NH90. NH인더스트리즈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조별 과제를 위한 조 모임에 과제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대충하거나 빈둥거리는 사람도 있다. 후자를 프리 라이더(Free Riderㆍ무임승차)라고 한다. 또 여럿이 일을 나눠서 하는데, 나중에 합하면 뒤죽박죽인 경우가 있다.

일찍이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동료인 헨리 녹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살아오면서 지켜봤더니 한 사람이면 족할 일을 둘이 해선 잘 안 되고, 셋 이상이면 아예 마치지 않더라”고 적었다.

그리고 NH90은 어떤 점에서 조별과제의 저주일까.


창대한 시작, 미약한 끝의 공동개발

NH90의 시작은 창대했다. 그 끝이 미약한 게 문제지만도.

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가 공동투자해 NH90을 생산하는 NH인더스트리즈 로고. NH인더스트리즈


나토(NATOㆍ북대서양조약기구)의 핵심인 프랑스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ㆍ영국은 1985년 한자리에 모여 다목적 헬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영국은 87년 슬그머니 빠졌고, 프랑스ㆍ독일ㆍ이탈리아ㆍ네덜란드가 공동투자해 NH인더스트리즈를 세웠다.

95년 첫 비행에 성공했다. NH90은 많은 기대를 모았다. 디지털 비행 통제시스템인 플라이-바이-와이어(FBW)를 헬기 중 처음으로 달았다. 동체를 복합소재로 만들었고, 스텔스와 소음 설계가 적용됐다.

NH인더스트리즈는 2000년 1차 배치분 366대의 주문을 받았다. 포르투갈은 2001년 6월 NH90 사업에 동참했다. 스페인과 핀란드, 호주와는 NH90의 현지생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우선 생산. 생산량이 주문량보다 턱없이 부족해 매번 인도 시기를 어길 수밖에 없었다.


계약보다 6년 늦게 간신히 1대 인도받아

노르웨이는 2001년 14대의 NH90을 계약해 2005~2008년 동안 받기로 했다. 그러나 2011년 12월에서야 첫 NH90이 노르웨이에 도착했다. 지난해까지 노르웨이가 인수한 NH90은 13대였다. 노르웨이가 화가 나 계약 파기와 함께 환불을 요구했다.

수송기에 실려 운송 중인 NH90. NH인더스트리즈


개발과 생산을 골고루 분배한 게 발단이었다. 이탈리아는 기어 박스ㆍ유압 시스템ㆍ자동 비행 조절 시스템 등을, 프랑스는 콕핏(계기판)ㆍ엔진ㆍ로터(회전날개) 등을, 독일은 연료 시스템ㆍ통신 시스템 등을, 네덜란드는 랜딩기어ㆍ도어 등을 각각 생산하고 있다. 시제 1~3호기는 프랑스에서, 4호기는 독일, 5호기는 이탈리아가 각각 만들었다.

생산 공장은 NH인더스트리즈의 지분을 30% 이상 가진 이탈리아(32%)ㆍ프랑스(31.5%)ㆍ독일(31.5%)에 따로 뒀다. 이러다 보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기 힘들었다.

게다가 품질도 좋지 않았다.


특수부대가 레펠할 수 없는 헬기

독일의 빌트는 2012년 NH90의 문제점을 폭로했다. 빌트 기사에 따르면,

NH90은 측면 도어뿐만 아니라 후방 램프로도 타거나 내릴 수 있다. 그런데 후방 램프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게 문제였다. NH90은 레펠 하강이 안 됐지만, 나중에 개량을 통해 가능해졌다. Key Aero


①사람과 군장의 무게가 110㎏이 넘으면 좌석에 앉을 수 없다.

②전투화로 바닥을 내리쳐도 부서진다.

③완전군장을 한 장병이 후방 램프로 타거나 내릴 경우 파손된다.

④레펠 하강을 못 한다.

⑤측면 도어에 기관총을 거치하면 타고 내릴 수 없다.

⑥동체 하부 안테나 때문에 16㎝ 이상의 장애물 위에 내릴 수 없다.

등이 발견됐다. 레펠 하강 등 일부 문제점은 고쳐졌다. 그러나 호주 감사원은 NH90의 인수비용은 1대당 6500만 호주달러(약 558억원)로 UH-60M의 4배라고 지적했다. UH-60M은 호주가 NH90을 대체하려고 선정한 기종이다. 그리고 시간당 유지비도 5만 달러다. 전투기 유지비 수준이다.


참여국 폭탄 돌리기로 전락한 전투기

조별과제의 저주는 NH90이 처음이 아니다. 무기체계의 공동개발ㆍ공동생산이 활발한 유럽에선 사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탈리아 공군의 유로파이터.EPA=연합


에어버스의 A400M 다목적 수송기는 납기 지연으로 12억 유로의 위약금을 물었고, 엔진 기어 박스 결함 등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고 있다. 그러면서 에어버스의 투자 국가 중 하나인 스페인은 스페인이 당초 주문한 27대 중 13대의 항공기 취소를 고려하고 있다.

독일ㆍ프랑스ㆍ스페인 합작의 유로콥터 타이거 공격헬기의 경우, 독일은 개량을 포기하고 2038년 퇴역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 역시 개량 포기를 검토하고 있다. 이 공격헬기 22대를 산 호주는 2021년 전량 퇴역과 AH-64E 아파치 공격헬기 29대 도입을 발표했다. 호주는 유럽산 NH90으로도 학을 뗐으니, 유럽과 잇따른 악연을 기록했다.

한국의 차세대 전투기(FX) 사업에 도전했던 유로파이터는 높은 도입가와 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 참가국이 떠맡은 수량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일종의 ‘폭탄 돌리기’다


우크라서 맹활약 스텔스 미사일은 예외

조별과제가 그림자만 있는 게 아니다. 우크라이나에 양도돼 맹활약하고 있는 스텔스 순항미사일인 스톰 섀도는 영국ㆍ프랑스가 함께 설계했다. 프랑스에선 SCALP-EG라 불린다. 프랑스ㆍ이탈리아의 공동 방공 구축함 사업인 호라이즌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

지난 6월 파리 에어쇼에서 전시 중인 스톰 쉐도/SCALP-ED 순항미사일. AP=연합


그래서인지 프랑스ㆍ독일ㆍ스페인의 6세대 전투기 사업인 FCA, 영국ㆍ일본ㆍ이탈리아의 6세대 전투기 사업인 GCAP, 독일ㆍ프랑스의 차기 전차 프로그램인 MGCS, 프랑스ㆍ독일ㆍ스웨덴의 미래 중형 전술 화물수송기 FMTC 등 유럽 중심의 다국적 무기 체계 공동 사업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조별과제, 아니 공동개발을 하면 개발비용을 분담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그러나 사업의 효율성보다는 정치적 이해를 앞세워 부품ㆍ생산을 참가국 사이에서 배분한다면 부품 가격 인상→생산 비용 폭등→납기 지연→주문 축소→부품 가격 인상의 악순환에 빠진다.


KF-21이 악순환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국에서도 조별과제의 저주가 어른거리고 있다.

엄동환 방위사업청장은 4~7일 인도네시아에서 KF-21 보라매 분담금 문제를 협의했다. 인도네시아는 2016년 KF-21 개발비의 20%인 1조 7000억원(이후 약 1조 6000억원으로 감액)을 2026년 6월까지 부담한 뒤 시제기 1대와 각종 기술 자료를 이전받고 전투기 48대를 현지생산하기로 했다.

그러나 현재 2783억원만 낸 상태다. 인도네시아는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미루고 있으면서, 프랑스와 라팔 42대 계약(81억 달러 규모)을 맺었다. 인도네시아 대신 아랍에미리트(UAE)나 폴란드와 손잡을 수 있다는 외신 보도가 이어졌지만, 정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다.

관련 사정을 잘 아는 소식통은 “KF-21의 사업에 인도네시아의 참여가 필요한 건 아니다. 인도네시아와의 전략적 협력 관계, KF-21의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인도네시아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귀띔했다.

‘조별과제=실패’란 공식은 없다. 제대로 잘 운영하면 시너지 효과와 승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게 조별과제다. 인도네시아든, UAE든, 폴란드든 KF-21의 공동 파트너를 환영하기에 앞서 냉정하고 꼼꼼하게 손익 계산서를 따져야 할 것이다. 조별과제의 저주를 피하려면 말이다.

이철재 국방선임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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