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는 '소맥용'이 아닙니다, 인문학입니다
[이현파 기자]
▲ <맥주의 시선> |
ⓒ J&jj |
나에게도 맥주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봉쇄의 시간에 접어들었던 2020년, 가장 좋아하는 취미인 공연 관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랠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혼술'을 하면서 다양한 맥주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수제 맥주(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유튜브 채널을 찾아보았고, 편의점과 대형마트에 있는 맥주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때부터 '맥주는 거기서 거기'라는 친구의 말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라거, 밀맥주, IPA, 페일 에일, 스타우트, 세종, 고제, 메르첸... 이렇게 다양한 맛의 세계가 존재할 줄은 몰랐으니까.
최근 <맥주의 시선>을 출간한 윤한샘 저자에게는 맥주가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듯하다. 그는 출장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갔던 2008년을 회고한다. 이곳에서 맛난 독일 맥주를 마시면서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썼다. 회식의 위압감이 지배하는 음주와는 결이 달랐고 이 경험이 그를 맥주 업계로 이끌었다.
<맥주의 시선>에서 저자는 맥주를 역사적, 인문학적으로 접근한다.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소개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맥주의 역사를 '구성'한 시대적 맥락을, 그리고 맥주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저자는 맥주를 통해 어제와 오늘을 오간다. 우아한 신맛을 자랑하는 람빅 맥주가 만들어진 양조장을 찾아 떠난다. 독일을 대표하는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의 왁자지껄한 공기를 전달한다.
역사의 순간을 경유하며 맥주에 서사를 부여하는 순간이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다. 맥주 덕후라면 꼭 먹어봐야 할 흑맥주인 '파운더스 포터' 뒤에는 영국 노동자의 애환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이자 록밴드 오아시스(Oasis)가 사랑한 맥주인 '기네스'에서는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역사를 읽을 수 있다.
▲ 벨기에식 밀 맥주를 대표하는 호가든 |
ⓒ James Cridland |
"크래프트 맥주에서 '크래프트'는 단순히 '수제'라는 의미를 넘어 지역성, 다양성, 지속가능성 같은 가치를 의미한다. 이 가치들은 좁게는 지역 재료나 다양한 맥주 스타일, 친환경과 같은 뜻이 되지만 넓게는 지역 사람, 문화, 인권, 그리고 환경 문제 같은 이슈도 포함한다." - <맥주의 시선> 176쪽
우리에게 맥주의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상징되는 '황금색 라거'는 1842년 체코의 맥주인 필스너 우르켈에서 시작된 것이다. 라거가 가장 일반적인 맥주이고, 에일이 그 이후에 개발된 것으로 생각하기에 십상이지만, '황금색 라거'는 맥주의 역사 전체에서 후반기에 개발된 것이다. 가장 흔하게 마시는 맥주의 맛조차도 새로움을 추구하는 혁신의 과정에서 탄생했다.
맥주 한잔에는 인간의 창의성, 도전 정신이 있다. 역사와 자연, 문화와의 오랜 상호 작용 역시 담겨 있다. 그것은 맥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음식, 그리고 하잘것없는 잡동사니마저 역사의 산물이다. <맥주의 시선>에서 저자가 견지하고 있는 시선은 바로 이것 아닐까.
팬데믹 이후 '혼술' 붐이 불면서 편의점을 중심으로 수제 맥주 붐이 일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이 '대기업의 굿즈'와 다름없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맥주에 머물렀다.
정작 수제 맥주의 다양성을 보여주지 못했다. 편의점을 수놓았던 대부분의 수제 맥주는 사라졌고, 그 자리는 편의점용 하이볼이 대체했다. 그러나 맥주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새로움을 추구하는 맥주 혁명은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재진행형일 테니까.
"2022년 미국에 9000여 개, 한국에 180여 개의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 있으니 가히 혁명이라 해도 될 듯하지만, 사실 여전히 맥주 시장의 90%는 라거로 덮여 있다. 하지만 혁명이 아니면 또 어떤가." - <맥주의 시선> 129쪽
여전히 누군가에게 맥주는 그저 소맥을 만드는 데 필요한 '강화 재료'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맥주의 한 단면이라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맥주의 의미는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맥주의 시선>을 읽어보면 그 복잡다단한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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