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의 질문에 '읽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서부원 기자]
▲ 햇살이 내리쬐는 교실 |
ⓒ unsplash |
'안 되면, 되는 것 해라.' 한 아이의 카톡 상태 메시지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이른바 '군인 정신'을 재치 있게 비튼 표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설정해놓고 애면글면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자조이며, 요즘 아이들의 보편적인 정서이기도 하다.
공부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동기 부여 방법은 자발적 학업 성취다. 열심히 공부하니까 성적이 오르더라는 성취감은 공부를 향한 의지뿐만 아니라 자존감까지 높여주는 교육의 핵심 요소다. 다양한 영역에서 아이들의 성취감을 북돋우는 게 교육 본연의 역할이라는 의미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가르치니까 아이들이 올곧은 시민으로 성장하더라는 성취감이야말로 교육자적 열정을 샘 솟게 하는 연료다. 목이 터지도록 수업해도 달라지는 게 없고 되레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진다면, 교사로서의 소명 의식조차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좌절감과 분노를 토해낸 동료
"혼자 애쓴다고 우리 교육이 변할 것 같아요? 아이들의 몸은 학교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학교를 떠났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좌절감과 분노가 뒤섞인 동료 교사의 말에 힘없이 맞장구를 쳤다. 우리 교육 현실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라 반박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부정하는 셈이어서 선선히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대꾸가 의미 없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의 말마따나, 아이들의 성장에 학교 교육이 미치는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음을 절감한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고, 학교에선 잠을 잔다'는 조롱을 넘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 지금의 공부가 아이들을 과연 성숙한 시민으로 길러내는지부터 성찰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학교는 '수험 공간'일 뿐, 진짜 교실은 손안에 있다. 그들은 스마트폰과 태블릿 피시를 이용해 공부하고, 친구와 교류하고, 취미생활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보고 듣는다. 장담컨대, 대입이라는 제도의 '도움'마저 없다면 학교 교육은 이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간과한 것일 뿐, 공교육 붕괴의 징후는 오래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 전인 2010년대 초 '일베'가 정치권과 언론의 관심을 등에 업고 아이들 사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때부터다. 당시는 극소수의 일탈 행위였지만, 지금의 '일베'는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요즘 아이들의 입에서 무시로 튀어나오는 욕설은 당시 일베 유저들이 퍼트린 것들과 다르지 않고, 맹목적인 여성 혐오 등은 더욱 극심해졌다. '일베'라는 말이 잘 들리지 않는 건, 그 수가 줄어들어서가 아니라 보편화했기 때문이다. 반사회적 언행은 그대로인 채 용어만 사라진 셈이다.
아이들이 대놓고 젊은 여성 교사를 희롱하고, 성 인지 감수성 함양을 위한 교육을 두고도 페미니즘의 공격이라며 발끈한다. 장애인과 외국인 노동자를 향한 조롱과 중국인에 대한 혐오 역시 당시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다. 북한과 전라도에 대한 차별 의식 또한 나아진 게 없다.
지난 십수 년간 이른바 '일베 문화 척결'은 학교 교육의 핵심 목표였다. 다문화의 이해 등 세계 시민 교육과 성 인지 감수성 함양 교육, 인간에 대한 공감 능력을 높이기 위한 공동체 교육 등 교과목과 상관없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아울러 교사 대상 연수도 의무화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는 자조가 만연해있다. 학부모가 어설픈 법과 제도를 무기 삼아 자녀의 일탈 행동을 두둔하고 보호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까지 포개지며 교사의 열정은 꺾이고 학교 교육은 무력화됐다.
"더는 학교가 문제 행동을 일삼는 아이들을 개과천선 시킬 수 없어요.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우리가 뽐냈던 세계 최고의 인터넷 환경도, 스마트폰 보급률도 우리 교육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들을 통해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숱한 '반교육적 콘텐츠'를 학교가 어찌해 볼 수 없다는 겁니다."
한 동료 교사는 자극적인 콘텐츠와 교과서와의 싸움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유했다. 당장 양적으로도 비교가 안 될뿐더러 영상 콘텐츠에 길들어버린 순간 교과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고 잘라 말했다. 교사의 강의 또한 교과서를 낭독하는 것쯤으로 여긴다는 거다.
그는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만을 문제 삼진 않았다. 스마트폰에 범람하는 콘텐츠들이 아이들의 윤리 의식과 가치관 형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어릴수록 매사를 옳고 그름이 아닌, 재미있고 없고의 문제로 치환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뉴스가 '유해 콘텐츠'가 된 현실
객관적인 공중파 뉴스조차 아이들에게 '유해 콘텐츠'가 됐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정부와 국회에서조차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일들이 횡행하는 현실을 꼬집은 거다. 멀리 갈 것 없이 최근 수개월 내의 굵직한 뉴스만 모아놓아도 '역대급 반교육적 콘텐츠'로 자리매김할 거라고 덧붙였다. 아직 대한민국 사회에 희망을 품고 있는 아이들이 절대 접해서는 안 된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뉴스가 윤리 의식과 가치관의 전도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새만금 잼버리 파행 운영부터 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해병대 사망 사건 수사 외압 의혹까지 어이없고 몰상식한 일들이 줄을 이었다. 또, 방송통신위원장과 국방부 장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여성가족부 장관 청문회는 청문회의 필요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을 들게 했다. 35년 만의 대법원장 인준 부결은 화룡점정이었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대놓고 부인하는가 하면, 사고가 발생해도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동문서답하는 게 다반사고, 느닷없는 역사 이념 논쟁을 벌이는 등 갈라치기를 일삼고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모습이 차라리 안쓰러울 지경이다.
'장삼이사' 수준도 못 되는 그들이 버젓이 고위공직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마당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는 학교의 가르침은 현실을 모르는 헛소리가 됐다. 이젠 아이들조차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 앞에선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대꾸조차 할 수 없다.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나날이 싸늘해져만 간다. 그들이 '헬조선'과 '이생망'을 말버릇처럼 되뇌는 부박한 현실 속에서도 교사로서 혼신 다해 희망을 외쳐왔건만, 요즘 들어 도무지 힘이 나지 않는다. 거꾸로 가는 세상을 더는 막을 수 없다는 열패감마저 든다.
'Honesty is the best policy? 개구라!' 다른 한 아이의 카톡 상태 메시지다.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영어 속담을 조롱한 거지만, 나름 그의 '경험칙'일 테다. 정직한 사람이 되레 손해를 보고, 사악하고 약삭빠른 이가 득을 보는 세태를 속어까지 써가며 꼬집은 것이다.
윤리 의식과 가치관이 전도되고 학교 교육이 무력화한 현실 앞에 교사로서 자존감마저 곤두박질치고 있다. 내일도 아이들 앞에서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치겠지만, 그들은 그 말을 귓등으로 들을 뿐 가슴에 새기진 않을 것이다. 가슴 차가워진 이들이 이끌어갈 우리 사회의 미래가 걱정된다.
글을 마무리하려니, 한 아이로부터 당혹스러운 카톡이 왔다.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의 청문회 '도망' 사건과 대통령이 신원식 국방부 장관과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전격 임명했다는 뉴스를 접한 모양이었다. 딱히 뭐라 답하기도 뭣해 그냥 '읽씹'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왜 현 정부의 장관들 중엔 '정상적인'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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