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탓에 병원 응급실과 접수처가 모두 닫혔다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이길상 2023. 10. 7. 15: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커피로 맛보는 역사, 역사로 배우는 커피] 1960년대 초 커피타임의 교훈

[이길상 기자]

전쟁, 혼란, 가난, 부패 등 1950년대가 물려준 수많은 해결 과제를 안고 1960년대가 시작되었다. 물론 최대 과제는 정치 독립에 이은 경제 독립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 각자가 각성하여 내 나라 것을 먹고, 내 나라 것을 입고, 내 나라 것으로 검소하게 살아가야 했다. 그런 구호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남의 나라가 주는 구호 물품을 받아 가며 살아가던 어려운 시절이었고, 밀수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1960년대 초반의 커피 문화는 어떠했을까? 경제적 풍요와 생활의 서구화 등 물질문명의 최첨단을 경험하고 있는 우리 세대의 사고 속에는 60여 년 전인 그 시대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강하게 들어 있다. '설마 전쟁 직후나 60년대 사람들이 커피를 많이 마셨겠어?', '그때 사람들이 커피 맛을 제대로 알았겠어?' 이런 인식들이다.

이런 인식의 끝에는 '그 시절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겠어?'라는 역사 인식이 숨어 있다. 역사를 선별적으로 배운 우리 시대 사람들의 오해이며 오만이다. 지금 시대가 많은 부분에서 엄청난 수준의 발전을 이루었고, 그 결과 대단한 수준의 복지와 문화생활을 향유하고 있지만 모든 면에서 지금이 과거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거나 오만이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쳤던 커피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과 다르지 않은 1960년대 커피
 
 1960년 5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의 공과'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커피는 이제 우리들 생활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많은 애호가들이 늘어가고 있다." 요즘 얘기가 아니다. 1960년 4.19혁명 직후인 5월 2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의 공과' 첫 문장이다. 당시 언론에서 "언제부터 배운 커피이기에 이를 수입하여 1년에 10억 잔, 2천만 불을 소비하는 쓰라림"을 방치하냐고 외쳐댔지만, 시민들이 커피 마시기를 포기하거나, 커피에 관한 시민들의 관심이 줄어들지는 않던 시절이었다.

커피와 관련해서 지금 우리가 자주 하는 질문을 60년 전에도 했었고, 그에 대한 대답도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동아일보> 기사는 커피의 경우 "그 성질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마시느냐에 따라 공과가 다르다"는 해석을 하였다.

이 기사는 커피의 특징은 그 열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카페인과, 열매에 가해지는 열로 인해 발생하는 쾌적한 향기에 있고, 이것이 인체에 여러 가지 효과를 주게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이어서 커피의 효능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카페인이 뇌신경에 미치는 영향으로는 가벼운 흥분을 일으키고 졸림을 제거하여 피로를 회복시키는데 효과적이다. 그리고 심장의 활동을 촉진하여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고 근육의 힘을 증가시켜 활동력을 부여하기도 하고 정신을 집중시켜 사고력을 증가시키는 등 두뇌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와같이 커피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유익한 음식인 것이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해는 없다. 다만 적은 양일지라도 신경에 흥분을 주는 것이니까 도를 지나치게 마시면 나쁘다."

이 기사는 결론적으로 하루에 두서너 잔쯤은 크게 해를 가져오지 않지만, 신경이 과민한 사람은 취침 전에는 삼가는 것이 좋고, 우유를 넣었다고 카페인의 작용이 약화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이나 상식을 총동원한다 해도 커피의 효능이나 부작용과 관련하여 이 기사의 내용에 덧붙일 것이나 무엇 하나 뺄 것이 없다.

당시 유행의 첨단이었던 커피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기사들도 넘쳐났다. 커피의 향기에는 화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물질이 20여 종이나 들어 있다거나, 인도의 영양연구소에서 실험한 바에 의하면 커피를 볶을 때 발산하는 기체에는 살균 작용 성분이 들어 있다거나, 커피 분말을 달걀의 노른자위나 흰자위 또는 우육에 뿌리면 분해를 저지하는 작용을 한다(<동아일보> 1960년 3월 20일 자)는 것은 일종의 커피 과학이었다.

커피 1파운드(453그램) 가격에 해당하는 돈을 버는데 소요되는 노동시간은 미국 16분, 캐나다 34분, 스웨덴 60분, 노르웨이 71분, 영국 81분, 화란 93분, 벨기에 97분, 스위스 100분, 프랑스 110분, 서독 180분, 이탈리아 216분이라는 기사(<조선일보> 1960년 5월 10일 자)는 커피 사회학 지식이었다.

1960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9895달러, 이탈리아 4564달러, 한국은 904달러였다. 국민소득이 한국과 비슷하거나 조금 높았던 나라로는 짐바브웨, 잠비아, 아이티, 앙골라, 방글라데시 등이 있었다. 환산해 보면 커피 1파운드 구입을 위해 우리나라 사람은 아마도 1000분(16시간) 정도의 노동을 해야 했다. 미국인이 16분 노동으로 버는 돈을 우리나라 사람은 16시간 노동으로 벌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이런 소득 수준임에도 커피가 유행하였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이었다. 1960년 10월 23일 자 <조선일보> '만물상'을 보면 "다방 많기로는 한국의 서울이 첫째갈지 모르지마는 오지리(오스트리아)의 빈 역시 둘째가기를 서러워할 정도"였다. 이 신문이 본 1960년대 우리나라와 오스트리아의 공통점은 커피 많이 마시고 다방 많은 것이었다. 지금과 다르지 않다.

'커피타임'이 보여준 흥미로운 역사
 
 1960년 12월 4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보다 인명치료를 부탁한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당시 커피 문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60년 9월 12일 아침이었다. 오전 9시 45분경 서울의 금호동 고개를 내려오던 100명 이상을 태운 만원 버스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미끄러지며 마주 오던 시발택시 두 대와 충돌한 후 낭떠러지로 전복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승객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9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버스가 굴러떨어진 낭떠러지에 있던 판잣집 주민도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 참사가 커피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마침 이날 오전 한 시민이 아이의 병 치료를 위해 서류를 구비하여 국립의료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10시부터 10시 30분까지 기다려도 접수처에 사람이 없었다. 갑자기 응급환자를 가득 실은 트럭이 들어왔지만 응급실도, 접수처도 모두 닫혀 있어서 인사불성인 환자들이 대합실에 눕혀졌다. 직전에 벌어진 금호동 버스 전복 사고 부상자들이었다.

왜 접수처가 닫혀 있었을까? 문제는 커피였다. 이 병원의 모든 의료 요원들과 접수 요원들이 오전과 오후로 한 번씩 정해진 '커피타임'을 갖는데 마침 그 시간이 오전 10시였던 것이다.

이 시민은 '애타는생(生)'이라는 닉네임으로 <동아일보>에 독자투고를 했다. 투고에서 이 시민은 커피를 비난하기보다 "커피타임을 갖고 싶거든 일에 지장이 없도록 윤번제라도 마련하였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 제목은 "커피보다 인명 치료를 부탁한다"였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고 기사였다. 우선, 1960년대 초 병원 노동자들에게도 '커피타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노동자들이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중요하다.

1950년대부터 미국의 노동 현장에 널리 보급되었던 '커피브레이크' 문화가 '커피타임'이라는 명칭으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노동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시 국민소득 수준이 세계 최하위권이었음에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경제 선진국 수준으로 보장하려는 움직임이 사회 일각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노동조건 보장에서 경제 수준의 높고 낮음은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진료를 하는 의료진뿐 아니라 접수처에 앉아 있어야 했던 의료 지원 인력들에게도 동일하게 '커피타임'이 주어져 있었다는 것도 의미 있는 역사다. 노동조건 보장에서 노동의 위계는 고려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흥미로운 역사였다.

버스 한 대에 100명이 타야 했던 시절, 서울 시내에 판잣집이 즐비했던 시절, 외국의 구호 물품에 의지해 살던 시절에도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휴식을 보장하려던 아름다운 직장, 정상적인 사람들은 있었다. 60년 전 우리의 선배 세대들이 결코 무지하거나 무식하지만은 않았다. 독재와 불의에 맞서 과감하게 일어섰던 것이 63년 전 커피를 즐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선배 세대였다.

(교육학자,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 저자)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조선일보> 1960년 2월 16일, 5월 10일, 10월 23일 자. <동아일보> 1960년 3월 20일, 5월 24일, 12월 4일 자.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