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대통령 뒤에 이 법조인 있었다
영화나 책, 인물, 역사 등 국내외 다양한 사건과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교합니다. <편집자말>
[권신영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
ⓒ 연합뉴스 |
법조인 관료, 일본, 북한. 별개로 보이는 논란들이 1950년대에도 한 자리에 있었다.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 관료들이 주도 세력이었다. 1930~1940년대 군국주의 일본의 사고방식으로 교육받고 조선 총독부에서 관료 생활을 했던 이들로 이들은 반공을 내세웠다. 이때 한국 사회가 잃어버린 것은 민주주의였다.
▲ 대한민국 국회 의정단상에 답변을 하러나온 장경근 |
ⓒ 위키미디어 공용 |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엘리트 법조인 장경근(1911-1978)이다.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그는 일본으로 조기 유학, 1932년 교토 제3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대 법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1년 전인 1935년, 그는 그 어렵다는 일본 고등 문관 시험 사법과(한국으로 치면 사법고시)에 소년 급제했다.
조선으로 돌아와 해방 때까지 경성에서 판사로 재직한다. 해방 후 사회주의 세력을 배제해야 했던 미군정의 유일한 대안은 식민지 제도 재활용이었기 때문에 장경근은 경성지방 재판소 수석 판사를, 그리고 1948년에는 서울 지방 법원장을 지낸다. 이후, 이승만 정권 12년 동안 내무부 차관, 국방부 차관, 한일 회담 대표, 내무부 장관을 거쳐서 자유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등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그의 인생에서 불안했던 시기라면, 1948년 9월 정부 수립 직후 제헌 국회가 반민특위 특별법을 통과시켰을 때였다. 서울 지방법원에 근무하고 있던 그는 친일파에 해당되어 대법관 이상기와 함께 퇴진했다.
하지만 약 반년이 지난 1949년 이승만은 그를 내무부 차관으로 기용한다. 당시 이승만은 제헌 헌법이 규정한 권력 구조에서 행복하지 않았다.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 선출권을 국회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당 기반이 없던 그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은 기대 이하였다(당시는 자유당이 없었다).
또 이승만은 제헌 헌법에 명시된 지방자치제를 원치 않았다. 지방자치단체장을 국민이 선출함으로써 중앙을 견제하는, '분권적 요소'는 민주주의의 필수다. 하지만 이승만은 중앙 정부가 지방을 관료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중앙 집권적 질서를 원했다.
이때 이승만은 퇴임한 장경근의 비상한 머리와 불안한 입지를 정확히 포착한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조선총독부 문화가 몸에 배어있고 법에 능통한 장경근은 분권적 질서를 뒤집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후 정치적 돌파구가 필요할 때마다 이승만은 장경근을 불러들이고, 그는 비상한 머리로 이승만이 필요로 하는 동아줄을 어김없이 던져준다.
1948년 정부 수립부터 1960년 4.19 혁명까지 장경근이 이승만에게 주는 동아줄은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일그러지는 장면들과 겹친다.
▲ 지난 3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이화장에서 열린 이승만 전 대통령 탄생 148주년 기념식에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우선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해산이다.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자 장경근은 자신에게 적용되었던 반민특위법에 반격을 가했다. 잘 알려진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 습격은 그의 지휘하에 이루어졌다. 이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국회 부의장이 체포되면서 결국 반민특위는 해체된다.
다음은 1949년 지방자치법 시행 연기다. 제헌 국회는 지방자치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이 선거 실시 일정을 정하도록 하였다. 제도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지만 일정에 대한 권한이 대통령에 있음을 강조, 이승만은 지방 의회 선거를 무기한으로 연기했다. '반공과 국력'을 외친 장경근은 지방 자치는 한 국가 안에 여러 국가를 세우는 것이라 말했다. 정부 주도의 계몽 운동으로 국민이 정치적·도덕적으로 성숙해진 이후에야 지방 자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연기되었던 지방 선거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봄에 실시되었다. 이승만의 정치적 계산이었다. 국회에서 제2대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없음을 깨달은 그는 간접 선거에서 직접 선거로 전환시키는 정치적 모험을 계획한다. 직접 선거의 민주성을 외치며 지방 선거를 추진했고 2대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1950년대 내무부는 3번에 걸쳐 지방자치법을 수정, 점차 중앙집권적 구조로 전환시킨다.
세번째,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은 장경근의 작품이다. 당시 개헌안은 대통령 임기를 2회로 제한하되 초대 대통령은 예외로 한다였다. 이승만 3선을 위한 개헌이었다. 필요한 국회 찬성표는 재적인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였다. 하지만 찬성이 135표로 1표가 부족했고 국회는 부결을 선포했지만, 장경근은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0.333...'은 반올림 원칙에 의하여 버려야 한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마지막으로 장경근은 1957년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자마자 식민지 전시 동원 체제인 반상회를 부활시켰다. 매월 한 달에 한 번씩 전국의 사이렌이 울리면 모든 집에서 한 사람씩 나와, 반상회 개최 장소로 가서 정부(내무부)가 하달한 '이달의 실천 사항'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출석부까지 있었다.
두 가지 위헌적 요소가 있었다. 하나는 권리의 측면으로 특정 단체에 가입하지 않을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강제성이 적용되는 의무의 측면으로, 헌법에 규정되지 않은 의무였다. 야당의 빗발치는 반대에 장경근은 직접 국회에 출석했다. 그는 반상회가 '민주 여론'을 형성하는 장이 될 것이며, 정부와 국민간 대화 통로로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포장하고 밀어붙였다.
장경근의 '그럴싸한' 포장은 미국에 통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대사관은 이것이 전체주의적이며 1958년 선거를 겨냥한 조치라며, 장경근의 정치적 의도를 정확히 꿰뚫었다. 그리고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보고문을 작성해 미국 본국으로 보냈다.
미국 대사관 분석대로였다. 한국 사회의 여론은 반자유당으로 흘렀다. 자유당 정책위원회 핵심이었던 장경근은 결국 1960년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 경찰 국장과 도모해 3.15 부정 선거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최인규와 함께 4.19 혁명으로 체포된다. 당시 장경근과 같이 체포된 인물들로는 김형근, 이익흥, 이근직, 한희석이 있다. 이들 모두 조선 총독부의 경찰, 검사, 혹은 국민 정신총동원 운동 도연맹 책임자 등 전력이 있으며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내무부 장관으로 재직했다.
한희석은 내무부 차관에 그쳤다. 하지만, 그는 실무 차원에서 장관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0년대부터 조선 총독부 지방 행정에 깊이 관여하였고 정부 수립 이후 내무부 지방 국장으로서 분권적 지방 자치제에 반대, 1950년대 지방자치법 개정을 직접 주도했다.
4.19 혁명으로 이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들 덕에 제헌 헌법이 구상했던 민주주의 질서도 동시에 사라졌다. 잔머리에 지나지 않았던 똑똑함 그리고 신념과 철학이 부재한 해박한 법지식에 대한민국은 신생국으로서 1950년대 반드시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 민주주의 질서의 안정적 제도화를 위한 황금 기회를 날렸다.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26일 오전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서 열린 '건군 75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열병하고 있다. |
ⓒ 사진공동취재단 |
그로부터 60년 이상이 지난 현재, 법조인·친일·반공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 논의 속에서 윤석열 정부가 주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언어, 생활 방식, 그리고 역사를 통해 동일한 사회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유하는 집단을 뜻하는 '민족' 개념이다. 민족 개념으로 보았을 때 북한을 제외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3.1절과 8.15 광복절 대통령 기념사에서 민족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았다.
정부가 강조하는 반공의 기치는 민족보다는 실제 정치적 테두리를 갖는 공간, 즉 국가를 향한 애국주의를 강조한다. 민족주의의 개념과 연결된 3.1절과 8.15 해방보다는 국가의 테두리를 형성한 1948년 남한 정부 수립에 초점을 맞추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대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맥락에 있다.
민족 개념에 대한 가치 절하는 제국주의 용인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정치적 정당성보다는 경제 성장을 우선시하는 사고가 덧붙여지면서, 식민지기의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박정희 시기의 경제 성장을 부각시킨다.
이 사고방식이 향하는 지점은 국가주의다. 1950년대 경험을 보면 이는 권력의 중앙화와 권력 독점에 대한 길을 열어주고,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을 정부 내 소수 엘리트가 제시하며 국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모든 것이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지만 결과적으로 희생된 것은 민주주의였다.
1950년대와 유사한 2023년의 논쟁이 이끄는 지점은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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