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의 무모한 도전? 이경규 평생의 '꿈'이었다
[양형석 기자]
지금은 호주 국적의 말레이시아계 영화 감독 제임스 완은 <쏘우>와 <컨저링>을 연출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가성비 감독'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물론 제임스 완 감독은 <분노의 질주: 더 세븐>과 <아쿠아맨>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도 잘 만들지만 12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쏘우>로 1억300만 달러, 2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컨저링>으로 3억18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2017년 제임스 완에 버금가는 또 한 명의 '가성비 감독'이 할리우드에서 대이변을 일으키며 등장했다. 450만 달러로 만든 연출 데뷔작 <겟아웃>과 20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어스>로 나란히 2억55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한 조던 필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조던 필 감독은 작년에 개봉한 <놉>이 6800만 달러의 제작비를 투입해 1억7100만 달러의 실망스런(?) 흥행성적을 남겼지만 여전히 뛰어난 가성비의 감독인 것은 분명하다.
▲ <복수혈전>은 모르는 사람이 흔치 않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정작 영화를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
ⓒ 이화예술필림 |
서세원부터 박성광까지, 개그맨들의 영화 도전기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코미디언 출신들이 연출에 도전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일이다. < TIME >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코미디언 부문에 선정된 고 찰리 채플린은 <시티 라이트> <모던 타임즈> 등 자신의 대표작들을 직접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90년대 초 <벤 스틸러 쇼>로 이름을 알린 코미디언 출신 배우 벤 스틸러도 <쥬렌더>와 <트로픽 썬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 대표작들을 직접 연출했다.
국내에서도 흔하진 않지만 개그맨들이 연출한 영화들을 종종 찾을 수 있다. 지난 4월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서세원은 1986년 영화 <납자루떼>를 연출했다. 하지만 서울 관객 1만7000명과 N포털사이트 평점 2.99점이 말해주듯 흥행에서는 크게 실패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서세원은 2004년에도 유오성이 주연을 맡은 <도마 안중근>을 연출했지만 역시 흥행과 비평 모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영화감독으로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개그맨은 단연 심형래 감독이다. 심형래 감독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영구와 공룡 쭈쭈>,<티라노의 발톱>,<파워킹>,<드래곤 투카> 등을 만들며 연출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었다. 특수효과와 CG가 결합된 괴수물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 심형래 감독은 1999년 신작 <용가리>를 선보였다. <용가리>는 관객들 사이에서 평가가 엇갈렸지만 심형래라는 개그맨이 영화인으로 인정 받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심형래 감독은 2007년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은 영화 <디 워>를 선보여 국내에서만 842만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심형래 감독은 자신하던 미국시장 진출에서 큰 실패를 맛보면서 결과적으로 <디 워>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심형래 감독은 2010년 자신의 대표 캐릭터인 영구를 전면에 내세운 <라스트 갓파더>를 만들었지만 이는 현재까지 심형래 감독이 연출한 마지막 영화가 되고 말았다.
심형래 감독 이후 10년 넘게 명맥이 끊어졌던 개그맨 출신 감독은 지난 3월에 개봉한 박성웅,이이경 주연의 <웅남이>가 개봉하면서 간신히 계보가 이어졌다. KBS 공채 22기 개그맨 출신으로 <개그콘서트>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성광 감독은 <개그콘서트> 폐지 후 예능프로그램에서 활동하다 <웅남이>를 연출하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웅남이>는 전국 31만 관객에 그치며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 <복수혈전>의 액션장면은 1990년대 초 한국영화의 제작현실을 고려하면 그리 나쁘지 않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
ⓒ 이화예술필림 |
학창시절부터 고 이소룡을 흠모하던 '액션키드' 이경규는 쿵후 4단의 실력자로 영화인을 꿈꾸며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 개그맨 시험에 합격하면서 진로가 변했지만 영화를 향한 그의 꿈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경규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몰래카메라>를 통해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92년, 드디어 자신의 꿈을 집대성한 정통 액션 영화 <복수혈전>의 연출과 주연, 각본, 제작을 맡으며 영화계에 뛰어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지금은 없어진 충무로에 위치한 스크린 극장에서 단관 개봉한 이경규 감독의 데뷔작 <복수혈전>은 서울 관객 2만에 그치며 흥행 실패했다. 결국 <복수혈전>은 '이경규 감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연출작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복수혈전>은 성룡이 주도하던 유쾌한 코믹액션이 대세를 이루던 1990년대 초반, 이소룡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스타일의 진지한 액션을 고집하며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다.
<복수혈전>의 가장 큰 패착 중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웃긴 개그맨'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이경규가 진지한 정통 액션 영화 <복수혈전>의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이다. 만약 무술의 달인인 이경규가 '빌런' 마태오(박동현 분)의 계략에 걸려 들어 세상을 떠나고 형에게 무술을 배웠던 동생 허석(현 김보성)이 수련을 해 형의 복수를 하는 스토리로 진행됐다면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더욱 수월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그맨 이경규가 만든 영화'라는 선입견을 빼고 영화를 감상한다면 <복수혈전>은 90년대 초반 영화임을 고려했을 때 액션영화로서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는 영화는 아니었다. 실제로 대중문화 평론가 김태훈은 <복수혈전>에 대해 혹평을 하면서도 '액션 연기만큼은 나쁘지 않았다'는 평을 내렸다. 30만 구독자를 가진 모 영화전문 유튜버 역시 <복수혈전>을 두고 "의외로 괜찮은 영화"라는 호평을 내리기도 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자신이 겪은 시행착오나 실패에 대해 최대한 가리거나 미화하려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이경규는 자신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복수혈전>을 꾸준히 개그소재로 활용하면서 시청자들에게 또 다른 웃음을 선사하고 있다. 이경규는 지난 2007년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해 "'멋 모르고 까불다가 날뛰면 홀라당 망한다'는 뜻을 가진 사자성어가 '복수혈전'"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 청춘스타였던 허석(왼쪽)은 <복수혈전>을 통해 처음으로 액션영화에 도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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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열아홉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노래>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이름을 알리던 허석은 <복수혈전>에 출연하며 이경규의 오명(?)을 함께 뒤집어썼다. 하지만 <복수혈전>은 액션 배우를 꿈꾸던 허석이 처음으로 출연했던 정통 액션 영화였고 허석은 활동명을 김보성으로 바꾼 1996년 <투캅스2>에 출연하며 그토록 원했던 액션연기를 원 없이 하게 됐다.
<대장금>의 장금이 엄마와 <왕꽃 선녀님>의 부용화, <조강지처 클럽>의 한복수 등을 연기했던 중견배우 김혜선은 1990년대 초 여느 청춘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가족드라마 <무동이네 집>과 월화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에서는 두 편 연속으로 최고 스타였던 최민수의 상대역을 맡았다. 김혜선은 <복수혈전>에서 허석의 아내이자 이경규의 제수씨 인혜 역을 맡아 청순가련한 눈물연기를 선보였다.
<복수혈전>은 당대 최고의 인기 개그맨 이경규가 만든 영화답게 카메오 군단의 면면도 대단히 화려했다. 청춘스타 손지창과 김찬우, 가수 겸 MC 임백천, 이경규의 개그맨 동기 김정렬 등이 그 면면이었다. 당시 신인가수였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카메오 출연 대신 자신들의 히트곡 <난 알아요>와 <환상 속의 그대>를 BGM으로 쓸 수 있게 허락했다. 하지만 다소 뜬금없는 타이밍에 카메오가 등장하면서 오히려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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