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행운의 여신

2023. 10. 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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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발을 든 사람들이 은행을 피해 이리저리 종종걸음을 걷는다. 바야흐로 가을이 깊어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 사이를 경주마처럼 질주하며 겁도 없이 은행을 밟아 뭉갠다. 집에서 공유 오피스까지는 도보로 945미터. 덧셈, 뺄셈, 곱하기, 나누기까지밖에 할 줄 몰라 수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갈지자로 걸음을 걸으면 987미터를 걷는 느낌이 든다. 할 일은 백 가지인데 몸은 하나뿐이니 걷는 시간이라도 아끼는 수밖에.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들썩들썩 몸은 위아래로 움직이는데 딸각딸각 필통 속 볼펜 부딪히는 소음이 말발굽 소리처럼 들려온다.

걷는 시간도 아끼는 판에 밥 먹는 시간을 아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하루 점심 한 끼, 한식 뷔페에 들러 배가 찢어지도록 밥을 먹는다. 저녁을 건너뛰려면 속을 든든히 채워둬야 하기 때문이다. 비름나물, 오징어젓갈, 두부구이에 제육볶음까지. 접시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음식이 블랙홀 같은 입안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TV에서 음식점 사장님들이 “아유, 이렇게 팔아서는 남는 것도 없어요”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귀여운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했건만 모든 손님이 나처럼 먹는다면 이 식당은 내일이라도 당장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사장님, 죄송하지만 저부터 살고 봐야겠습니다. 염치없이 배를 채우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기력이 다할 때까지 일을 하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이 되면 야식이 당기는 것은 당연지사. 배달 앱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 자신과 원만한 합의를 이뤄 편의점으로 향했다. 땅콩 한 봉지를 손에 쥐고 마실 거리를 고르려 냉장고에 다가섰다. 그런데 뽀얀 자태를 뽐내는 막걸리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아닌가. 기름 잘잘 흐르는 뜨끈한 김치부침개에 달큼한 저 막걸리 한잔하면 얼마나 꿀맛일꼬. 때마침 냉장고에 쉬어 꼬부라진 김치도 있으니 후딱 부쳐 먹으면 딱인데. 군침을 흘리는 것도 잠시, 부치는 일이야 금방이지만 치우는 일이 한참일 터. 내일도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니 음주도 금물이다.

하는 수 없이 보리차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거 원 플러스 원 상품이에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에 잊고 있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구입하려던 음료수가 원 플러스 원 행사를 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행운의 여신이 우릴 따라다니고 있나 봐!” 외치며 함박웃음을 짓던 그녀. 그 모습이 우스워서 나도 따라 웃었었다. 행운의 여신. 그것이 정녕 존재하는지 알 길은 없으나 막걸리 한잔 마음 편히 먹지 못하는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적어도 나를 따라다니지는 않는 듯싶다. 땅콩으로 속을 달래고 자리에 눕자 현관에 놓인 신발에서 풍겨오는 은행 구린내가 코끝을 스쳤다. 이곳은 살림집인가 마구간인가. 히히힝,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어김없이 아침은 밝아오고 나는 또 딸깍딸깍 출근을 했다. 바쁘게 일하다 보니 어느새 또 점심. 한식 뷔페로 출동해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고사리나물, 미역 줄기, 생선가스, 김치부침개. 잠깐, 이건 김치부침개잖아! 어쩌다 나에게 이런 행운이 다 찾아왔을까. 사장님의 따가운 눈총을 애써 외면하며 접시 위에 김치부침개를 그득 올렸다. 막걸리의 빈자리는 보얀 북엇국이 채워주었기에 일말의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후 치아 사이에 남아 있을 불청객을 쫓아내려 거울을 들여다보는데 그 속에서 행운의 여신처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는 일에 치여 한동안 잊고 있었다. 도처에 널린 행운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식당 밖으로 나서자 파란 가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더니 그것이 참말이로구나. 일터로 돌아가기를 잠시 미루고 두둑하게 부른 배를 문지르며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자그마한 행운들을 마주하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나를 맞이한 건 발을 들이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살벌한 은행 지뢰밭이었다. 그대로 걸음을 돌릴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택한 이유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산림청의 깊은 뜻은 아니었을까? 이다지도 철학적인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정말 행운아구나! 이제 막 글자를 깨친 아이처럼, 땅 위에 갈지자를 그리고 또 그려 본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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