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단어 하나로 변하는 K문학, 번역의 세계
다채로운 번역 과정 소개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 조지훈 ‘승무’ 中
한국 문학계에선 왜 노벨문학상이 나오지 않느냐는 물음에 누군가는 한글에 담긴 정감을 고스란히 전할 길이 없다는 말을 하곤 한다. 번역하면 고유의 ‘맛’이 사라진다는 것. 번역가 정은귀 역시 비슷한 맥락의 의문을 많이 들어봤다고 고백한다. 책 ‘K 문학의 탄생’(김영사)’서 그는 어디 가서 시 번역을 한다고 하면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김소월 ‘진달래꽃’) 번역이 가능하냐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며 "‘시’라는 장르가 갖는 고유한 힘과 리듬을 다른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떠올리면 그리 쉽지 않음은 분명하다"고 설명한다.
시 번역이 어려운 건 우선 해석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즈려밟고’는 ‘힘주어 밟고’로 해석되기도 하고 ‘미리 먼저 밟고’로도 읽히는데, 어떤 뜻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번역이 튀어나온다. ‘말맛’도 어려운 과제다. "원작이 가진 리듬을 도착어(번역된 언어)에서 그대로 살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시 번역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다.
다만 그럼에도 시 번역에 도전하여 의외의 결과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책은 시를 포함한 한국문학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힘쓴 번역가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번역가들에 따르면 번역은 ‘재창조’ 혹은 ‘재활용’ 행위다. 기계적으로 의미와 운율을 유지한 언어 탈바꿈이 아닌, 하나의 창조행위란 뜻이다. 번역가 김혜순은 그런 번역을 ‘낯선 매혹 쓰기’에 빗대며 ‘시를 감옥에서 탈출시켜주는’ 행위로 정의한다. 다만 그 탈출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데, 오히려 그러한 점이 "많은 시인과 번역가가 번역 작업에 매혹되었던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런 도전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번역가들은 ‘하늘’을 두고서 ‘Sky’ ‘Paradise’ 등의 미묘한 뉘앙스 차이를 고려한 결과 ‘귀천(歸天)’을 ‘Back to Heaven’으로 번역했다. 맥락을 고려해 ‘아 어쩐다’를 (영어 What to do가 아닌) ‘Shit’으로 번역하면서 같은 뜻, 다른 느낌을 구사하기도 한다. ‘Lost in translation’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로 번역하는 것도 유사한 사례다. 번역 과정에서 번역가들은 작은 구두점을 두고서도 삽입해서 의미를 선명하게 할지, 빼서 느낌을 살릴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런 노력으로 최근 세계적으로 한국문학의 위상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2011년 번역가 김지영이 옮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맨아시아문학상을 받은 이래, 2015년 데보라 스미스가 옮긴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후 부커상 후보에 ▲황석영 ‘해질 무렵’(2018 후보) ▲한강 ‘흰’(2018) ▲정보라 ‘저주토끼’(2021)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2021) ▲천명관 ‘고래’(2023) 등의 작품이 올랐다.
이들 작품은 의미나 가치보다는 재미에 가중치를 둔 ‘장르 서사’를 효과적으로 현지화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때 현지 문화 이해도가 높은 번역가는 필수. 이형진 번역가는 "번역가 대부분이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해외 국적을 가진 원어민이거나 해외에서 활동하는 원어민에 가까운 교포"라며 "한국문학이 한국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방식과는 다른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아울러 국내 번역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그는 "(국내에서는 번역이) 마치 문학이 지닌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으로 여기는 계급주의적 우월성이 존재한다"며 "번역 역량 자체가 부족한 국내 학자들이 번역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상황은 한국문학 번역의 발전에 걸림돌이자 기득권 문화의 폐해"라고 꼬집었다.
또한 책에는 번역가들의 개인적인 노력과 더불어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 내용도 상세하게 담겼다. 내용에 따르면 한국문학번역원은 2001년 설립 때부터 2021년까지 39개 언어권에서 2000건의 번역을 지원했다. 이를 통해 2021년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이 영국 대거상, 마영신의 ‘엄마들’이 미국 하비상, 김혜순이 ‘죽음의 자서전’으로 아시아 여성 최초의 캐나다 그리핀 시 문학상 영예를 거머쥐었다.
책은 14명 번역가의 입을 통해 하나의 번역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겸손한 봉사’를 하는 번역가들의 고민과 창조적 번역, 한류 열풍 속 당면한 과제 등을 내밀하게 살핀다. 재미난 번역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의외의 재미를 선사한다.
K 문학의 탄생 | 조의연 외 13명 | 김영사 | 416쪽 | 2만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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