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백 년간 처음 겪는 일... 정권만 바꿔서는 해결할 수 없다 [소셜 코리아]
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사에 대한 의견 또는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기자말>
[윤홍식]
▲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자리에서 국민이 장시간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자산을 축적해 사회경제적 위험에 대응한 것이 한국의 분배 방식이었다. |
ⓒ 셔터스톡 |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것일까?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것들이 흔들리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2023년 실질 경제성장률을 1.4%로 예측했다. '잃어버린 30년'이라고 불리는 일본과 같아진 것이다. 한국경제가 어려움에 처했던 1980년과 1997년을 제외하면 1973년 이후 지난 반백 년간 처음 겪는 일이다.
성장이 일자리를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자리에서 국민이 장시간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자산을 축적해 사회경제적 위험에 대응한 것이 한국의 분배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직면한 성장률의 둔화는 우리가 만들었던 성장을 통한 분배 방식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쪼그라든 그 성장의 성과도 점점 더 소수의 특권층에 집중되면서 부와 사회경제적 지위는 물론 '능력' 또한 부모세대에서 자녀세대로 세습되는 세습자본주의와 세습능력주의가 점점 더 고착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정'을 앞세우며 집권한 윤석열 정부에서 '불공정'이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고 평가하는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네 차례에 걸친 평화적 정권교체를 통해 불가역적이라고 믿었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윤석열 정부 들어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전체주의 정권의 중요한 신호라고 이야기했던 것들이 윤석열 정부의 행태와 소름 끼칠 정도로 겹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정부에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사회를 체제 "전복 세력", "헌법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하고, 집회결사의 자유를 위협하며, 노동조합과 언론을 적대시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민주화만 이루면 모두가 성장의 부를 공평하게 나눠 갖는 행복한 세상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우리가 꿈꿔왔던 그런 성장과 민주화가 아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는 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바란다면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니까. 그런데 고쳐야 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가장 잘해왔던 것이라면 어떨까? 더 나아가 그것 때문에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다면?
현실을 직시하자. 지금 한국 사회가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에 봉착한 원인은 우리가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놀라운 성공을 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책임을 무능한 윤석열 정부에 묻고 싶지만 윤석열 정부만의 책임이 아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통해 우리 모두가 헌신했던 성공이 만들어 낸 결과인 것이다.
성장 방식이 문제다
성장과 민주화가 사회경제적 위기를 낳는 것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구 국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화(산업화와 민주화)는 항상 긍정적 결과와 함께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단순히 놀라운 성공이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이 아니라 왜 한국의 놀라운 성공이 다른 사회보다 더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낳았는지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한국은 대기업에 자원을 불평등하게 집중하는 방식으로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루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제한된 상황에서 독재 정부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대기업에 자원을 집중했다. 더불어 한국의 산업화는 독일, 일본 등과 달리 노동자의 숙련에 상대적으로 덜 의존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으로 경제성장을 시작할 때인 1970년대 생산 현장에서는 수치제어(Numerical control, NC) 자동기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노동자의 숙련도를 충분히 높이지 않고도 산업화를 본격화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대기업이 급격한 공정 자동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도 우리나라 산업화의 이런 특성과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 기업이 생산공정 자동화를 얼마나 급격하게 추진했는지는 압도적으로 높은 '로봇 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한국 대기업의 성장이 단순히 돈 주고 첨단 설비를 구매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엔지니어들의 끊임없는 공정 혁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래서 철강, 자동차, 반도체, LCD 등 한국 대기업의 주력 상품은 모두 숙련된 엔지니어의 헌신적인 노력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러한 성장 방식을 통해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성장 방식은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불러왔다. '기술기능 축적 절약형' 성장 방식은 첨단 최종재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핵심 소재·부품·장비를 해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소재·부품·장비를 수입하니, 국내 중소기업이 최첨단 소재·부품·장비를 만들면서 기술을 축적하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 또 해외에서 중요 소재·부품·장비를 수입하니 국내 산업 간의 연관관계도 낮아졌다.
더욱이 이런 성장 방식 때문에 첨단 제품을 외국에 수출해도 수입한 소재·부품·장비 값을 지불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국내 중소기업에 다니는 숙련된 노동자가 부가가치가 높은 최첨단 소재·부품·장비를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도 하고 해외에 수출해야 돈이 국내에 머물 터인데, 이를 해외에 의존하니 수출해도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일부에서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 경제라고 부르는 이유다.
이런 성장 방식 때문에 노동시장은 괜찮은 일자리와 나쁜 일자리로 나눠지는 이중화가 가속화했다. 국내 중소기업은 중·저품질의 소재·부품·장비만 팔고 있으니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성장과 함께 갈 수 없다. 그러니 일자리가 대기업으로 대표되는 괜찮은 일자리와 임금과 노동 조건이 열악한 중소기업 일자리로 나눠지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기업 규모(대기업 대 중소기업)에 따른 생산성과 임금 격차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크다. 전체 일자리의 약 80%를 중소기업이 만드는데, 중소기업 일자리가 나쁜 일자리가 되어가니 청년이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워진다.
더 심각한 상황은 우리나라가 이런 방식으로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던 조건, 즉 세계화가 2008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 미·중 패권 경쟁,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계속되고 있는 무역적자는 성장을 이끌었던 우리의 성공 방식이 구조적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 부산항 신선대부두에서 컨테이너 하역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2023.9.21 |
ⓒ 연합뉴스 |
성장 방식이 미친 영향은 노동시장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성장 방식은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적 위험에 직면한 국민을 보호해야 할 복지에도 나쁜 영향을 주었다. 성장이 복지 확대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답게 대부분의 국민이 생존조차 어려운 절대빈곤으로 고통받았다. 전쟁 직후인 1953년 생존이 위협받는 요구호대상자 비율이 전체 인구의 49.3%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이런 참담한 상황이 60년대에 들어서도 유지되다가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1965년 40.9%에 달했던 절대빈곤율이 차차 감소하더니 1980년에는 9.8%까지 낮아졌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주목할 특성은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공적 복지의 확대 없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GDP 대비 사회지출(복지지출)은 가장 높을 때인 1996년에도 3.1%에 불과했다. 한국 사회에서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했던 힘은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공적 복지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는 고도성장이었다. 고도성장이 시장에서 일자리를 만들고 이렇게 만들어진 일자리에서 사람들이 저임금으로 장시간 일을 하면서 빈곤에서 벗어났다. 모두가 열심히 일해서 빈곤에서 벗어났으니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것도 각자 열심히 일해서 대비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진이 3나노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초도 양산을 시작하면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
ⓒ 삼성전자 |
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 사회에서 빈곤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열심히 일하는 중산층에게도 복지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부터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 12월, 우리 사회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것이다. 김대중 정부 시기는 한국 복지국가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을 전 국민으로 확대하고, 취약계층의 최저생활을 보장해 주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도 도입했다. 한국 복지국가의 원년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한국이 서구 선진국처럼 국민연금,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을 확대하면, 서구 선진국처럼 복지국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보험은 매월 정기적으로 사회보험료를 납부해야 사회적 위험에 직면했을 때 복지급여를 받을 수 있는 제도다. 그러나 노동시장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괜찮은 정규직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고 불안정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고 있었다. 외환위기는 이런 경향에 불을 질렀다. 노동시장이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데, 공적 복지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임금노동에 기반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확대된 것이다.
결과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불안정 고용상태에 있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사회보험으로부터 배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2020년에 발생한 코로나19 위기를 떠올려 보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대부분이 비정규직이거나 영세 자영업자였다. 그런데 그들은 고용보험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없었다. 대부분이 고용보험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니까. 복지가 확대되었는데도 가장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이 공적 사회보장제도에서 배제되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 지난 2일 오전 서울 용산대통령집무실 앞에서 노년아르바이트노조, 평등노동자회 관계자들이 65세 이상 기초연금 수급 대상 축소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먼저 국민 누구나 좋은 돌봄과 교육을 받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양질의 사회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정의 경제 사정이 어떠하건 간에 양질의 돌봄과 의료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장해 줘야 한다. 풍족한 수준까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경제적 문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거나 기회가 제한돼서는 안 된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일들은 국가가 공적 복지를 확대하면 가능한 일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성장 방식을 바꾸는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핵심 소재·부품·장비를 외국에서 수입해 최첨단 자동화 설비로 첨단 상품을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는 방식은 대기업의 성장에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국민 대다수가 일하고 있는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에는 좋은 성장 방식이 아니다.
모든 것을 국내에서 생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핵심 소재·부품·장비의 일정 부분은 국내 기업이 생산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금 미국, 중국, 일본, 유럽 정부가 하는 일을 보라. 반도체와 같은 핵심 소재를 자국 내에서 생산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지출하고 있다. 우리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경쟁력 있는 소재·부품·장비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중견기업, 대기업을 지금보다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모든 일자리를 다 좋은 일자리로 만들 수는 없지만, 10~20%에 불과한 좋은 일자리를 30~40%로 늘릴 수는 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일자리가 늘어나면,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란 청년들이 좋은 일자리에서 일할 기회가 지금보다 더 많아질 것이다.
이를 통해 수출과 내수가 균형적인 성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특히 2008년부터 세계 경제의 경향을 보면 세계화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 확연해지고 있다. 물리적 상품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짜여 있던 세계의 가치사슬이 디자인, 기획, 설계, 사후서비스 등과 같은 서비스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실제로 2008년부터 국가 간 교역 증가율이 GDP 성장률보다 낮아지고 내수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성장 방식을 이렇게 바꾸기 시작하면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는 것이 지금보다 더 중요해질 것이다.
▲ 윤홍식 / 소셜 코리아 편집·운영위원장(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
ⓒ 윤홍식 |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윤홍식 인하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소셜 코리아>의 편집·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관심영역은 복지국가를 정치, 경제, 복지의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한국사회정책학회장(전), 시민사회에선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장(전)을 역임했고, 주요 저서로는 <한국 복지국가의 기원과 궤적>(1~3), <이상한 성공>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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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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