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뤘네" 고구마 캐던 엄마의 고백
가족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들, 농사 짓는 부모님 vs. 마케터 딸이 함께 농사일 하는 이야기. <편집자말>
[최새롬 기자]
추석 연휴에 고구마를 캤다. '일이 얼마나 많으면 명절에도 일을 할까?' 싶겠지만, 일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선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8월 말부터 캐기 시작했으나 9월 말에도 캐고 있는 고구마, 그런데 오는 10월 초중순까지 캘 예정인 고구마. 그때까지 고구마는 땅 속에 있어도 된다.
6월 중하순 주말 내 모두 수확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처럼 작업했던 양파나 감자와 다르게, 고구마는 8월 말에 조금 캐고, 9월 말까지도 야금야금 캐도 된다. 그래도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작물의 컨디션과 일정을 바삐 쫓았던 날과 다르게, 고구마는 이러 저러한 인간의 사정을 봐주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된다'라는 단어를 쓰게 만드는 고구마의 매력에 대해 알아보자.
▲ 수확한 고구마와 그걸 멀찍이서 지켜보는 왕초고양이 |
ⓒ 최새롬 |
작물의 특성, 출하 시기, 유통 방법, 투입되는 노동력, 고객 선호도 등으로 구성된 육각형의 그래프가 있다면 고구마는 아마도 육각형을 꽉차게 그려내는 작물 중 하나일 것이다. 수확할 때 고구마는 감자보다 햇빛을 오래 봐도 된다.
수확 시 다만 30분이라도 해를 보지 못하게 덮어둬야 하는 감자와는 달리, 고구마는 색이 퍼렇게 변해서 독이 생길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구마는 양파처럼 햇빛에 오래 일주일씩 말릴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어떤 작물보다도 빠른 수확이 가능한데, 어째서 가장 긴 시간을 들여 수확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오랫동안 고구마 농사를 진 이력으로 '알음알음'이라는 유통망을 구축하셨기 때문이고, 단순하지만 고구마가 '맛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9월에 새롭게 심어야 하는 작물이 없어, 고구마 밭은 거의 1년 내내 고구마의 것이다. 8월 말에서 10월까지 주문이 꾸준한 고구마.
부모님은 고구마를 팔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으신다. 그때그때 캐면 되니까 저장고도 필요하지 않다. 비도 주춤하고 해도 춥지 않은 계절, 고구마는 느긋하게 인간의 부족한 일정과 노동력을 봐준다. 시일에 맞춰 몰아치는 수확이 아니고, 주문량에 따라 두 시간, 많으면 너덧 시간, 아주 많아도 반나절을 작업하는 고구마 수확은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노동이다.
소일거리처럼 보임에도 그러나 부모님께 고구마는 수확의 공백기를 책임지는 중요한 농사이다. 우리 집은 6월 말 감자를 출하하고 10월 벼농사 수확을 앞두기까지 뾰족하게 수확하는 작물이 없는데, 이때 고구마는 중요한 수익원이 되어준다. 이것은 아마도 300평 가량의 작은 규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대규모로 고구마를 짓는 농가의 경우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농가의 주문이란 무엇인가. 주문 하나에도 '스토리'와 '히스토리'가 섞여 들어온다. 단순히 '고구마 10kg짜리 2박스 주문할게요'로 떨어지지 않는다. 첫 번째 주문은 일전에 고구마를 두 박스 사간 이웃의 전화로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식이다.
▲ 박스 작업을 마친 고구마 10kg. |
ⓒ 최새롬 |
또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인 아무개씨가 "5박스 가져갈게요"란다. 이야기를 어제 전해 왔다는데, 벌써 입금이 들어왔다.
"아니, 고구마는 아직 캐지두 않았는디…"
먼저 들어온 돈이 불편한 어머니는 금세 밭으로 나가신다. 이런 저런 사연의 주문들이 모여 추석 연휴 한나절 우리는 15박스, 약 160kg 고구마를 캐는 작업을 시작했다.
고구마 수확에도 감자처럼 새로운 동사가 출현해 '캐'지 않고 '털'수 있지만, 이 밭은 기계를 사용하기엔 용이하지 않아서 사람이 호미로 캤다. 한편으론 아버지가 비에 엎어진 벼를 다시 반대로 젖히는 작업을 하러 가셔야 해서, 이날 고구마 수확은 대부분 어머니 몫이었다.
'이런 밭에서 고구마 키우고 싶었다'는 어머니
▲ 고구마 줄기 걷어내기 작업 고구마 줄기 걷어내기 작업을 하시는 아버지 |
ⓒ 최새롬 |
여기서 '비닐을 걷는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지만, 사실 여기엔 여러가지 힘이 작용하는 역학을 이해해야 한다. 초보자가 잘못해서 고랑의 비닐을 걷으려 하면 흙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찢어지는 비닐을 줍느라 시간을 다 보낸다(내가 그랬다).
걸어나가는 속도와 방향, 비닐을 붙드는 각도를 잘 조절해 비닐을 덮었던 흙을 흘려 보내야 하는데, 만약 첫 속도와 방향이 잘못되면 비닐의 양 옆을 덮었던 흙은 한도 끝도 없이 쌓이게 된다. 힘이 세서 흙을 털어낼 수 있어도, 속수무책 끊어지는 비닐을 붙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베테랑 농부는 어떻게 비닐을 걷는가? 그는 밭을 대각으로 걸어나가며 비닐과 자신과 흙이 팽팽하게 힘을 유지하도록 조정한다. 그러면 비닐에 흙이 쌓이지도, 찢기지도 않고 시원하게 걷어진다. 비닐을 덮었던 양 옆골의 흙은 후두둑 후두둑 양갈래로 쏟아진다. 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그가 얼마나 멋지게 밭을 걸어나가는지는(허리조차 한번도 굽히지 않고!), 직접 해보고 목격한 사람만이 아는 장관이다.
비닐을 다 걷었다면 이제 고구마를 캐자. 고구마 캐기는 '모래성 게임'과 비슷하다. 모래성에 깃발을 꽂고 깃발이 쓰러지지 않는 한에서 가장 많은 흙을 가져가는 게임 말이다. 여기서 깃발은 고구마와 비슷하다. 고랑을 중심으로 두고 앉아서 두둑 양 옆의 끝에서 중심 쪽으로 흙을 덜어낸다. 고구마는 줄기가 있는 흙 위에서부터 캐지 않는다. 반드시 양 옆의 흙을 덜어내 땅 속의 고구마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마침 밭에는 입자가 고운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서 호미질에 힘이 크게 들지 않고 고구마 흙도 잘 털어졌다. 나는 모래가 많이 섞인 밭이라 고구마가 자라기 좋았으려나, 캐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입을 떼 말씀하신다.
"계속 바라고 꿈꾸면, 정말로 이뤄지나 봐."
고구마를 캐다가 "꿈은★이루어진다"라는 대화라니. 꿈이라는 단어도 낯설고 놀랍지만 그것이 이루어졌다는 확언은 상상한 적도 들어본 적도 없어 더욱 생경하다. 무슨 맥락인지 짐작도 되지 않아서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여쭤보니, 이렇게 답을 하신다.
"사실 이런 밭에서 고구마를 키우는 게 내 꿈이었어. 이렇게 좋은 땅에서 고구마를 키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지. 그런데 정말로 이런 밭에서 고구마를 캐보게 되네. 계속 바라니까 이런 땅을 부치게도 되었네."
나는 속으로 답한다.
'하지만 어머니, 이 밭은 우리 밭이 아니잖아요…!'
어머니는 이 밭을 농사 짓게 되었다고 감격스러워하셨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부모님의 밭은 아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빌려서 부치고 계신 것인데도(그리고 대부분의 다른 땅 또한 빌린 땅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점에서 행복해 하셨다.
부모님은 20대 후반부터 평생 농사를 지어오셨다. 그동안 이 땅 저 땅 농사를 지어오셨는데 처음에는 주어진 논과 밭을 지으셨다. 여남은 땅, 그다지 질이 좋지 않은 땅을. 이 작물 저 작물에 좋은 밭이 무엇인지 아는 데에도 또 수 년이 걸리셨다. 그렇게 좋은 땅이 무엇인지 알았을 무렵에는 다른 이들이 한참 짓고 있어서 기회가 없으셨다. 그렇게 돌고돌아 60대 중반이 되어, 마침내 이 밭을 만나게 되신 것이다.
내가 고구마 작업을 돕지 않았더라면
이건 특정한 땅이나 밭이나 대지, 어떤 것의 '소유'를 목표로 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염원이었다. 좋은 밭을 일구고 싶은 마음이 꿈처럼 간절하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않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꿈'이란 단어 아니면 달리 무엇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 같았다.
반복되는 노동에 심드렁해지고 지치던 차였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래 꿈꿨던 밭에서(그것도 다름 아닌 어머니의 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세가 바로잡히고 좀더 조심스럽게 호미질을 한다. 나는 그저 우연처럼 만나게 된 밭이 실은 어머니의 오랜 꿈이었다는 것도 오늘 알게 되었다.
▲ 탐스러운 고구마를 부드러운 흙이 감싸고 있었다. |
ⓒ 최새롬 |
9월의 따사로운 가을 햇볕이 내 목과 등허리에 내리쬐고 있었다. 당신의 땅도 아니면서 그 밭을 빌려 부치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고 이야기하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말씀에 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혹시 다른 꿈도 있으신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호미질을 잠깐 멈추고는 어머니가 고구마 캐시는 걸 지켜 보았다. 흙이 가벼웁게 쓰러지는 소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함께 줄줄이 땅 위로 나온 고구마를 두 손으로 쓸어 흙을 털어 내신다, 정성스럽게. 고운 모래 흙을 쓰고 세상으로 나온 고구마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걸 가만히 오래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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