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작'에 집착하는 예술가의 특별한 사연
[고광일 기자]
▲ 영화 <거미집> 스틸컷 영화 <거미집> 스틸컷 |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김열 감독(송강호)은 최근 촬영을 마친 신작 '거미집'에 대한 생생한 꿈을 반복해서 꾸게 되고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된다는 확신을 한다. 딱 이틀 간의 추가촬영이면 된다는 그는 제작자 백 회장(장영남)을 찾아가고 신성필림의 후계자인 신미도(전여빈)의 도움으로 베테랑 배우 이민자(임수정), 톱스타 강호세(오정세), 떠오르는 스타 한유림(정수정)을 불러 모아 촬영을 시작한다.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된다는 김열의 주장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상업영화의 기본적인 상영시간이 있는데, 고작 이틀의 추가촬영으로 이를 걸작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는 말은 처음부터 뜯어고치지 않아도 될 정도의 기본은 갖췄다는 의미. 물론 그의 주장대로 이틀의 시간을 더 준다고 걸작이 될지는 의문이지만, '그냥 하던 거 하라'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굳이 '거미집'을 재촬영하겠다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보이는 표면적 이유는 명예 회복이다. 데뷔작 '불타는 사랑'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스승인 신상호 감독의 작품에 숟가락만 얹었다는 평을 들어왔다. 이후로는 3류 치정극만 뽑아낸다는 악평과 조롱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김열 주변의 누구도 걸작을 내놓으라고 강요하지 않지만 "그대로 찍으면 틀림없이 걸작이 된다. 이걸 알고도 비난이 무서워 피하면 죄악이 된다"며 열등감의 거미줄로 스스로를 옭아맨다.
▲ 영화 <거미집> 스틸컷 영화 <거미집> 스틸컷 |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거미집에 집착하는 김열의 3가지 미스테리
'거미집'에 대한 집착은 신상호 감독의 등장으로 명예 회복에서 한 차원 높은 단계로 확장된다. 바로 창작자의 고뇌다. 김열은 주위에서는 방해만 하고 자신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이에 대해 신상호는 '자신을 믿는 게 재능'이라고 대답하며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모든 걸 불태우라는 조언을 남기고 사라진다. 신상호의 대사는 영화 속에서 이해되지 않던 김열의 세 가지 행동에 해답의 실마리를 준다.
첫 번째는 극중극 '거미집' 변경된 시나리오다. 어찌저찌 촬영은 진행되지만 주연인 이민자의 캐릭터가 중간에 바뀌기까지 하는 시나리오를 이해하는 배우, 제작진은 없다. 시나리오가 김열의 내면의 소리를 자전적으로 형상화한 예술인 탓이다. 그러나 이를 비난할 수는 없다. 시종일관 비협조적이던 한유림(정수정)이 문공부의 고위공무원이 현장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잘 보이기 위해 열연을 펼치는 것처럼 예술은 이기적인 욕망의 표출을 동력으로 삼기도 한다.
▲ 영화 <거미집> 스틸컷 영화 <거미집> 스틸컷 |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거미집>은 다른 등장인물의 욕망을 반복적으로 표현하며 독창성의 중요함을 강조한다. 전쟁영웅 역할을 하고 싶다고 강짜를 놓다가 결국 사냥꾼 역할까지 뺏기고 마는 오랜 친구(정인기), 한유림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다른 남자의 아이임을 알고 절망하는 호세, 걸작에 참여하고 싶어 연기를 해보지만 재능의 부족으로 결국 한유림의 자리를 대체하지 못한 신미도까지. 예술적 열망이 가득한 캐릭터들도 본인들이 갈망하는 독창성의 획득은 녹록잖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거미집'이라는 명사는 어색하다. 거미가 사는 집이랑 거미집보다 거미줄이 먼저 떠오른다. 김열이 굳이 생소한 단어를 제목으로 삼은 비밀은 클라이맥스에서 밝혀진다. 이민자가 30년간 준비한 복수, 호세를 둘러싼 끔찍한 진실이 폭풍처럼 지나고 알부자 오 여사의 재산을 차지하는 최후의 승자는 한유림이 된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금고에서 거대한 거미가 튀어나오고 놀란 한유림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구른 뒤 "나는 거미가 싫어"는 대사를 읊조리고는 사망한다.
▲ 영화 <거미집> 스틸컷 영화 <거미집> 스틸컷 |
ⓒ 영화 <거미집> 스틸컷 |
극중극을 찍은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
이렇게 모든 물음이 해결됐다고 생각할 무렵. 김지운 감독이 놓은 덫 하나가 발길을 잡는다.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등 주연배우들의 스텝 롤이 올라간 뒤 문제의 쁠랑 세깡쓰로 찍은 극중극의 엔딩신이 화면을 채운다. 이틀을 더 찍은 거미집은 김열 감독의 소망대로 기립박수를 받는 걸작이 됐을까.
그런데 스크린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는 장면은 어딘가 조금씩 이상하다. 오 여사의 대사도 살짝 다르고 미친 듯이 집안에 번져가던 불길도 어느새 사그라들었다. 석유를 들이부어 숯 더미가 되어야 마땅한 집에는 거미줄이 잔뜩 처져 있고 혈투 끝에 사망한 인물들은 거미줄에 칭칭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다. 이 장면은 도대체 무엇인가.
<거미집>으로 영화에 대한 영화에 도전한 김지운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쫓을 수 있다.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서 강 사장(김영철)의 유명한 이 대사에 앞뒤로 붙은 선우(이병헌)의 대사는 "말해봐요. 저한테 왜 그랬어요"와 "아니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봐요"다. 강 사장은 선우의 바람처럼 진짜 이유를 말했을 수도, 선우의 확신처럼 거짓 이유를 들었을 수도 있다.
흔들리는 건 나뭇가지나 바람이 아니라 나의 마음 탓이라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눈물을 흘린다. 탄탄한 자신감, 뛰어난 테크닉, 고뇌를 버텨내는 인내, 불타는 예술혼, 관객을 향한 진심을 갖추고 작품 밖에서 흔드는 외부 상황을 모두 극복해도 창작자에게 만족스러운 함박웃음을 끌어낼 완벽한 마침표는 쉽게 찍을 수 없다.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 돌이킬 수 없는 결음이 있다는 걸 반복해 온 김지운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그럼 걸작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창작자의 고통은 모두 여기서 시작된다. 딱 이틀이면 되는 게 나만 좋자고 이러는 건 정말 아니다. 걸작에 집착하는 예술가의 특별한 사연이자, 평작이라도 내놓길 고뇌하는 보편적 이야기인 <거미집>에 더 많은 관객이 발이 묶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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