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절초 핀 지리산 성삼재에서 천은사까지
[이완우 기자]
지리산 정령치에서 백두대간의 연봉을 시야에 담고, 내리막길 도로로 4km 아래에 이르면 달궁삼거리이다. 추석 연휴인 10월 초순의 지리산 얼음골 농장은 가을 햇살이 투명하게 내리쬐고 있었고, 성삼재로 향하는 지방도로의 자동차 소리와 달궁계곡 물소리가 함께 들렸다.
▲ 달궁계곡 (1995년) |
ⓒ 류요선 |
달궁 계곡길은 예로부터 지리산 유람 길이었고, 지리산에 기대어 사는 민초들의 애환 어린 삶의 현장이었다. 남원 산내면에서 구례 산동면으로 보부상들과 주민들이 오가던 장길이었다. 달궁 계곡을 따라 올라가서 심원마을에서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의 묘봉치를 넘어 구례 산동으로 8km를 이어가는 지리산 역사의 한쪽이었다.
▲ 상선암 눈썹바위 |
ⓒ 이완우 |
달궁 계곡의 심원마을은 2017년에 철거되었다. 지리산 생태계를 복원하여 반달곰 등 멸종위기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보호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달궁계곡으로의 옛길은 비법정탐방로가 되어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예로부터 하동군 의신마을을 거치는 벽소령길, 남원시 구룡폭포 육모정길, 구례군 달궁 계곡의 산동길을 지리산의 3대 옛길로 손꼽는다. 류요선씨는 달궁 계곡 탐방로가 허용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며, 유서 깊은 옛길은 보전해야 한다고 했다. 통행 금지된 달궁 계곡을 바라보며 어름골 농장에서 달궁 계곡의 물소리를 듣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성삼재를 향한 도로를 자동차로 올라갔다. 성삼재에서 상당히 먼 곳의 도로변까지 자동차들이 주차했고, 관광객들은 줄지어서 성삼재로 걸어 올라간다. 성삼재 주차장이 성수기 관광객들의 차량을 충분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성삼재를 중심으로 남원 산내면 쪽과 구례 산동면 쪽의 도로가 길게 이어진 갓길 주차장이 되었고, 지리산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 상선암 구절초 |
ⓒ 이완우 |
성삼재에서 천은사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시암재 휴게소를 지나고 상선암과 수도암을 찾았다. 상선암(上禪庵) 가는 길은 화강암 너덜지대이다. 둥글둥글 마모가 잘 된 바위가 소나무와 잘 어울린 오솔길도 있다.
소나무 줄기 밑동 가까이에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 있는데, 사찰에서 예전에 등화(燈火) 재료로 송진을 썼던 흔적이라고 한다. 전나무가 높이 30미터 이상이고 가슴높이 둘레가 2미터가 넘는 나무가 여러 그루 기세 좋게 성장하고 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같은 지역에서 경쟁하면 전나무가 우점종이라고 한다.
상선암 암자의 편액은 명필 창암 이삼만(1770~1847)의 글씨라고 한다. 상선암의 8미터 높이의 커다란 눈썹바위는 처마바위라고도 하는데 기울기 20도 정도로 서 있는 암반이 빗물을 막는 지붕 역할을 한다. 이 바위 아래 석간수가 고이는 맑은 샘이 있어서 암자가 자리 잡은 터전이 되었다.
▲ 수도암 구름 |
ⓒ 이완우 |
어느 날 아리따운 여인이 이 암자에 나타났다. 스님은 여인에게 정감이 생겨 선방을 차고 나섰다. 사뿐히 산속으로 올라가는 여인을 따라가던 스님은 어느덧 높은 산봉우리에 이르렀다. 홀연 여인은 간 곳이 없고, 산봉우리가 찬란히 빛나고 관세음보살이 서 있었다. 스님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털썩 무릎을 꿇고 참회하였다.
스님은 산봉우리 바위 아래에 암굴을 파고 들어앉아 수도에만 전념하였고 세월이 흘러 스님이 득도하였다. 스님이 득도하는 순간 암굴 위의 바위에서 종소리가 났다. 그래서 이 산봉우리를 종석대라 한다. 산봉우리 모양이 차일을 친 형상이라고 차일봉, 관음보살의 현신이 있었다고 관음대, 우번 스님이 득도한 곳이라서 우번대라고도 한다.
우번 스님의 이름 글자인 소 우(牛)와 뒤칠 번(飜)의 의미는 상징적이다. 농부의 밭에서 조 이삭 알맹이를 몰래 먹고, 소가 되어 3년 동안 농부의 밭에서 일을 한 후에 소의 너울을 벗고 깨달음을 얻은 문수보살의 길상 동자 우화가 있다. 우번 스님의 일화에서 이 길상 동자의 우화가 연상된다.
▲ 천은사 천은저수지 |
ⓒ 이완우 |
수도암(修道庵)은 승용차로 도량 주차장까지 도달한다. 큼직한 바위로 성벽처럼 쌓아 가람의 터전을 닦았다. 상선암이 소나무와 너덜 바위의 오솔길을 걸어 찾아가는 운치가 있는 가람이라면, 수도암은 수도선원 건물이 웅장하고 대웅보전 금당의 위용이 당당한 가람이다.
수도암 도량 앞 하늘의 구름 풍경이 기대 이상의 선물이었다. 맑은 가을 햇살이 내리는 숲 너머로 멀리 원산이 펼쳐지고 층운이 가볍게 하늘에서 내려와 앉았고,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가볍게 떠가고 있는 여유로운 장면이었다.
천은사(泉隱寺)는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로 원래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임진왜란 때 감로사가 불타서 1610년에 중창하고, 1679년에 천은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천은사 일주문 앞에 섰다. 智異山 泉隱寺, 일주문의 '지리산 천은사' 글씨는 추사 김정희(1786~1856)보다 조금 앞선 시대의 명필 이광사(1705~1777)가 썼다. 이 글씨와 관련하여 천은사에는 사찰 유래 전설이 전해온다.
▲ 천은사 일주문 |
ⓒ 이완우 |
이 천은사 설화를 들으며 언뜻 수긍되지 않는 면이 있다. 지리산의 큰 계곡에는 항상 물이 흐르기 마련인데, 계곡에 자리 잡은 샘이 마를 리는 없다. 설화는 비유이고 상징이 풍부하니,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의미를 찾아 생각해 보았다.
서산 대사(1520~1604)는 젊은 시절에 지리산에서 수도하였다. 지리산 동서남북 서산대사의 일화가 곳곳에 전해온다. 구례는 서산 대사의 오도송이 전해오는 의미 있는 지역이다. 서산 대사가 이곳 구례 감로사 가까운 곳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을 수 있다. 서산대사가 지리산 산청의 단속사(斷俗寺)에서 삼가귀감(三家龜鑑)을 편찬하여 선가귀감, 도가귀감과 유가귀감의 순서로 출판했다.
▲ 천은사 돌담 |
ⓒ 이완우 |
1610년(광해군 2)에 감로사를 중창했는데, 서산대사가 입적한 지 6년 후이다. 감로는 달콤한 샘물을 의미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이나 진리를 감로라고도 한다. 천은사의 샘 천(泉)을 감로가 솟아나는 원천으로 이해한다면, 천은사는 부처님의 지혜와 깨달음이 고요히 머문 곳으로 풀이할 수 있다.
감로사를 중창할 때 서산 대사에 대한 추모의 정과 유림에 의해 사찰이 쉽게 불타버릴 수도 있었던 시대 상황이 후대에 이 사찰의 이름이 천은사로 바뀔 때 반영되었고, 이러한 구렁이 설화가 오늘날까지 전승된 것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구렁이가 죽어서 샘이 말라버린 절이라는 사찰 연기 설화보다는, 지리산에서 서산 대사가 깨우친 진리와 지혜가 고요히 머문 절이라는 천은사 이야기가 더 개연성이 있다.
▲ 천은사 차나무 꽃 |
ⓒ 이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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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지리산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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