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브스] 최영찬이 만난 혁신 리더(18) 이현우 은하수산 회장

2023. 10. 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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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물 가공업의 무한 혁신

수산물 가공·유통 기술의 발전은 회를 택배로 받아 집에서 즐기는 밀키트 시대를 열었다. 이현우 회장이 이끄는 은하수산은 국내 최초로 활어 필렛 기계를 도입하는 등 업계를 이끄는 대표 혁신기업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소비 트렌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식문화가 대표적이다. 그전까지 대면 서비스가 중심이던 식품·외식 시장은 배달 음식 트렌드에 자리를 내주었다. 1인가구의 급격한 증가와 함께 활성화된 가정간편식(HMR) 시장도 더욱 커졌다. 간단한 음식부터 이름난 맛집 요리까지 웬만하면 집에서 즐길 수 있다. 최근에는 배달이나 간편식으로 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던 음식들도 가정에서 편하게 즐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생선회, 생선구이 등이 대표적이다. 가공과 포장, 유통 기술이 발전하면서다.

부산에 자리한 은하수산은 국내를 대표하는 수산물 가공·유통 전문기업이다. 1970년 부산 자갈치시장에 ‘영도상회’로 문을 연 이래, 지난 2000년 현재의 사명으로 설립했다. 고교 졸업 후 양친이 운영하던 시장 점포에 아르바이트로 합류한 이현우 회장은 40여 년이 지난 현재 은하수산을 매출 1200억원대(2022년 기준)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2025년 1800억원대 매출을 목표로 세운 은하수산은 기업공개(IPO)도 준비 중이다. 최영찬 선보엔젤파트너스 대표가 국내 수산물 가공·유통업계를 대표하는 이 회장을 만났다.

수산물이야말로 부울경을 상징하는 업종이다. 정말 꼭 한 번 뵙고 싶었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만들어줘 감사하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출발하셨다고 들었다.

부모님이 일찍부터 시장에 점포 2개를 얻어 수산물을 파셨다. 시장 상인들이 으레 그렇듯 어머니도 성격이 강한 분이셨는데, 하루는 시장 경비들과 시비가 붙었다. 마침 곁에 있던 나까지 합세했다. ‘안 되겠다, 옆에서 도와드려야겠다’ 싶더라. 198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장으로 출근했다.

처음부터 가업을 이을 생각이었나.

어릴 때는 부모님 속을 많이 썩인 철부지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고 툭하면 집을 나가기 일쑤였다. 부모님께 인정받는 아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가게 일을 돕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달라졌다. 일이 재미있어서 정말 열심히 했다. 말썽쟁이 아들이 부지런한 일꾼으로 변하자 부모님도 너무 좋아하셨다. 1년 남짓 사랑받으면서 일하다 1985년에 입대했고, 1988년 전역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장 일에 뛰어들었다.

자갈치시장에서 일 잘하는 직원이란 게 어떤 건지 감이 안 온다.

당시 자갈치시장에 문을 연 점포가 400~500개나 됐다. 1등부터 5등까지가 그나마 좀 크고,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우리 가게가 한 10등 정도 됐는데, 내가 들어가고 나서 불과 2년이 안 돼 1등으로 올라섰다. 그러니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겠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한테 알바비로 한 달에 6만원을 받았는데, 낮에 다른 가게 물건을 자전거로 배달하니 하루에 2만원을 벌 수 있더라. 한 달 하면 60만원 아닌가. “엄마 내 그만할란다” 했더니 월급도 올려주고 뒷돈까지 챙겨주셨다. 군 제대 후에는 하루에 19시간씩 일했다. 딱 3년하니 장사에 대한 개념이 잡히더라.

말씀만 들어도 대단하다. 1등 점포가 된 비결이 뭐였나.

1등 하는 집의 비결이 도대체 뭔지 너무 궁금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물건을 대는 일식당 사장들과 정기적으로 만나며 관리하더라. 그들을 다 단골로 만든, 요즘 말로 하면 네트워크였다. 어떻게 하면 앞지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다른 지점을 공략하기로 했다. 바로 주방장들이다. 식당에선 사장보다 주방장이 실세인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친구들이 근무 마치는 시간이 밤 9시 30분이고, 청소 끝내고 자기들끼리 모이는 시간이 10시 무렵이었다. 그때 같이 어울려 술도 먹고 친하게 지내려 노력했다. 그들의 맘을 얻자 가게 사장에게 우리 물건을 추천하기 시작했다. 독립해서 가게를 새로 열어도 내게 왔다. 항상 1등 하던 집 거래처들이 우리 집으로 다 오더라. 그게 1년 반 걸렸다. 영도상회가 자갈치시장에서 1등 먹은 거다.

시장 상회에서 지금과 같은 기업으로 발전해온 과정이 궁금하다.

장사가 잘된다 해도 자갈치시장이나 상회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열심히 팔아도 수금이 안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횟집, 초밥집 같은 거래처들이 대부분 영세한 가게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직원들 명절보너스도 못 챙겨주니 너무 허탈했다. 아무리 철저하게 전략과 예산을 짜도 잘 안 됐다. 이렇게는 안 된다, 어찌 되든 큰 기업과 연결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대형 유통체인 말인가.

그렇다. 1994년 무렵 부산에 대형 유통체인인 ‘아람마트’가 처음 들어섰다. 개장 초기 찾아가 납품을 제안했고 계약에 성공했다. 처음에는 전복이나 대게 등 한 품목만 납품했는데도, 횟집 소매와는 비교가 안 됐다. 잘되는 날은 전복만 하루에 100kg을 팔 때도 있었다. 보통 20~30kg은 꾸준히 나갔다. 더 좋은 건 때 되면 돈이 나와 수금 걱정이 사라진 거다. 시장에서 팔 때보다 마진이 조금 적더라도 많이 팔아 많이 얻는 게 더 나았다. 감천에 물류센터와 냉동공장 겸 사무실을 내면서 자갈치시장을 벗어났다. 시장에선 1등 가게가 빠지니 가지 말라는 만류도 많았다. 조합장까지 제안했지만 “시장일은 나중에라도 하겠다”며 고사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내에도 대형 유통체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변화의 흐름에 과감히 올라타신 것 같다.

사실 아람마트 외에 거래처를 더 늘릴 계획은 없었다. 당시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후유증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1999년 들어 롯데마트(당시 롯데마그넷)가 부산에 문을 열었는데, 그곳 상품 담장자가 ‘자갈치시장에서 가장 잘나가는 도매업체’를 알아보고는 나를 찾아왔다. 하지만 당시는 많은 슈퍼체인이 부도를 맞고 문을 닫던 때다. 롯데에서 납품 제안을 받았지만 나 역시 멈칫했다.

롯데는 한국에서 가장 큰 유통업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그렇지만, 당시는 사업을 무리하게 벌리는 게 큰 리스크였다. 롯데마트 담당자가 한 번만 더 만나자고 하더라. 술잔을 나누던 그가 “다른 데는 다 납품하려고 안달인데, 너는 왜 그러냐”며 황당한 맘을 전했다. “시장 상황 자체가 너무 안 좋고, 지금 하는 걸로도 충분하다”고 했다니 “무조건 잘되도록 돕겠다”며 독려했다. 그렇게 장림 마그넷 1호점에 입점했다. 마그넷 점포 수가 계속 늘면서 우리 수익도 같이 늘어갔다. 시장에서 쌓아온 장사 감각이 있다 보니 마트에서도 문을 여는 곳마다 장사가 잘됐다. 요즘 말로 지속성장이 가능한 구조였다.

회사 규모가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003년에 코스트코 납품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광어 한 품목만 납품했는데도 연간 매출이 20억원 정도 되더라. 코스트코 본사나 매장은 서울과 수도권에 많았다. 제대로 공략하자 싶었다. 나를 포함해 특공대 4명과 함께 부산에서 인천으로 올라갔다. 30평 정도 되는 수족관을 임대했고 그곳 다락에서 5명이 합숙했다. 코스트코를 비롯해서 수도권 마트를 공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1년 반 동안 주말부부로 살았다. 밤 1시에 하루 치 물량이 입고되면 하역과 상차 작업을 새벽 4시에 마쳤다. 납품하는 매장마다 배송도 우리가 직접 했다. 코스트코 납품을 마친 다음에는 매장 청소까지 우리가 도맡았다. 그러니 마트 직원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나. ‘그 집 사장이 정말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나니 납품하는 품목도 하나둘 늘었다. 나중에는 스무 개가 넘었고 코스트코 매출로만 400억원을 기록했다. 이후로도 홈플러스, 편의점, 기업형슈퍼마켓(SSM) 등으로 거래처를 넓혀갔다. 그렇게 2021년 들어 1500억원대 매출을 올렸다.

급변하는 유통 트렌드에 맞춰 사업 전략을 과감히 변경한게 주효했던 것 같다.

이현우 회장이 최영찬 대표에게 연어 필렛 생산 자동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횟집 매출만으로도 연간 30억원은 가능했다. 하지만 아람마트 납품으로 2배 정도 커졌다. 2000년대 코스트코를 시작으로 수도권 메인 시장을 공략하면서 급격히 사업 규모가 커졌다. 국내에 대형마트 시장이 열리면서다. 당시 자갈치시장에선 “저런 거 오래 못 간다”고 하는 분도 많았다. 대형 백화점에 납품하다 도산한 이도 많았고, IMF 외환위기라는 사회 분위기도 비관적 전망을 더했다. 나 역시 새로운 흐름에 뛰어들지 말지 고민이 컸다. 두렵기도 했다. 납품 단위가 수억원대로 커지니 그야말로 간이 커야 베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방향을 정한 후로는 앞만 보고 달렸다. 처음엔 마트 안 회코너 하나만 운영하다가 신뢰를 쌓으면서 본사와 직매를 텄고, 품목도 하나씩 늘려갔다.

2010년대 들어서 또 한 번 변화를 주도했다. 원물 납품이 아닌 가공이다.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다 겪은 시행착오가 시작이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마트에서 점포를 운영해보면 어떻겠느냐”의 지인의 말을 듣고는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다. 역시나 특공대 3개를 조직해 당장 미국으로 갔다. 점포마다 실장은 우리 직원으로, 밑에 서빙은 멕시칸을 채용했다. 매출도 점포별로 4000만~5000만원씩 나왔다. 그런데 마감하고 나면 이상하게 로스가 너무 많더라. 원인을 분석해보니 황당했다. 멕시칸 직원들이 그날 팔고 남은 제품을 그냥 집으로 가져가더라. 직원 관리가 전혀 안 됐던 거다. 어느 날엔 직원 숙소를 갔는데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수백억, 수천억 벌 것도 아닌데, 기껏 우리 직원 컵라면 먹이려고 이 사업을 하나 싶었다. 바로 철수했다. 대신 미국에 수출할 다른 방법을 찾자고 마음먹었다.

활어 수출이 언뜻 생각해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마침 활어 수출용 컨테이너가 개발됐다는 정보를 들었다. 당장 구입해 실어 보냈는데, 폐사량이 너무 많더라. 배로 보름을 가니 살밥이 너무 야위고 육질도 떨어졌다. 수요가 워낙 크니 팔리긴 했지만, 품질이 한참 떨어지고 사업 성과도 크지 않았다. 수차례 시행착오 끝에 결국은 국내 영업을 강화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2014년 들면서 유통 못지않게 가공시설을 갖춰야만 원가경쟁력에서 앞서고 미래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녹산 1공장을 인수했다. 이어 본사 옆 부지를 인수해 4층 규모로 2공장을 새로 세웠다. 활어 수출과 냉동회 등에서 겪은 시행착오가 국내 영업 강화와 가공기술 투자로 이어진 셈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겪은 좋은 경험과 도전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한국 수산물을 찾는 교포들의 니즈를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R&D 투자와 신상품 개발에 매진한 결과, 지금의 은하수산을 대표하는 냉동 광어회와 뽀로로 생선구이를 개발하는 초석이 됐다. 냉동 광어회는 한국수산회 K-FISH 인증을 획득한 우리의 주요 상품으로, 첫 수출부터 미국 대표 한인마트인 H-Mart에서 완판을 기록했다.

육류와 달리, 수산물 가공은 신선도 유지 등 쉽지 않은 과정일 것 같다.

공기 노출을 최소화하는 게 관건이다. 살균과 세척도 중요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활어 필렛 자동화 설비를 구축했다. 광어 기준으로 1분에 55마리를 자동화해 작업한다. 공정 10분 만에 가공, 포장, 검수까지 완료하는 대량생산체제다. 수산물 업계에서 1등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자갈치시장 시절부터 고민해왔다. 마진을 얼마나 줄일지, 어떻게 하면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질지, 비용을 어떻게 절감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를 거듭했다. 결론은 자동화·기계화였다. 회를 공장에서 만들면 수족관이 필요 없으니 더 위생적일 테고, 활어차가 바닷물을 흘려 도로가 파손되는 것도 막을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네덜란드까지 찾아간 끝에 선어 필렛 가공기계를 찾았고, 실증을 거친 후에 들여왔다. 국내 최초다. 이 밖에도 식중독균 등을 제거하는 초고압 살균기로 특허를 냈고, 어패류 자동 세척기, 가스 치환 포장 설비, 항생제와 중금속 검사기 등도 구축했다. 공정 시간이 눈에 띄게 줄어 생산성이 향상된 건 물론이고, 무엇보다 식품 안전사고가 급감했다. 온라인몰도 바로 준비해서 관련 매출이 100억원 이상 뛰었다. 회를 택배로 받아 집에서 즐기는 시대가 온 거다. 현재 은하수산은 200여 개 제품군을 갖추고 있다.

올 5월에는 KBF를 인수하며 또 한 번 승부수를 던지셨다.

부산을 대표하는 종합 식품기업이 우리의 비전이다. KBF는 조미분말, 엑기스 등을 생산해 농심, 동원F&B, 오뚜기 등 대형사에 공급하는 소스 회사다. 150억원 규모 매출과 이익을 내고 있다. 소스는 수산물뿐만 아니라 모든 식품에 다 들어간다. 시장 확장성이 무척 크고 우리와 시너지를 낼 부분도 적지 않다. 은하수산이 한 단계 더 점프할 새 무기를 장착한 셈이다. 여기에 물류, 양식장, 다양한 프랜차이즈 사업 등으로 비즈니스 분야를 확장해갈 계획이다. 기업공개(IPO)도 예정돼 있다.

제품 하나하나 애정이 있으시겠지만, 특히 기억에 남는 제품이 있나.

정말 열심히 개발한 상품인데 출시하지 못하고 사장된 것도 있고, 단순히 리뉴얼해 내놓았는데, 뜻밖의 사랑을 받은 제품도 있다. 광어 필렛기를 도입해 선보인 광어 숙성회가 기억에 남는다. 국내 최초로 숙성회를 가장 위생적인 방법으로 대량 생산한 상품이다. 광어를 시작으로 우럭, 연어, 돔, 보리숭어, 방어 등 숙성회 소용량 패키지로 한국 표준을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은하수산의 미래 계획과 비전은 무엇인가.

수산물 가공업계는 몇몇 대기업을 빼고는 영세기업이 대다수다. 더 건강한 수산물을 소비자에게 공급하면서 지속가능하게 성장하는 기업이 우리의 목표다. MSC(Marine Stewardship Council, 해양관리협회)와 ASC(Aquaculture Stewardship Council, 양식관리협회) 인증을 보유하게 된 배경이다. 두 기관은 모두 세계자연기금(WWF) 주도로 설립됐는데, 수산업계 글로벌 인증 표준으로 통한다. MSC는 무분별한 어획 금지 등 지속가능한 어업 방식에, ASC는 해양오염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방식의 양식업 표준에 적용된다. 현재 우리는 매출의 1%를 WWF 자연보전 활동에 기부하는 제품군도 다수 갖고 있다. 올해 은하수산은 ASC가 주는 특별상을 수상했다. 지속가능한 수산업은 생산기업, 우리 같은 가공기업, 또 유통기업이 힘을 합쳐야 가능해진다. 향후 2~3년 후면 이 같은 인증을 받은 수산물이 대세로 자리 잡을 거라 확신한다. 대형 유통체인들도 우리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다. 향후에는 우리가 직접 ASC 인증 광어 양식장을 운영할 계획이다. 이미 테스트베드를 가동 중이다. WWF 인증 업체는 국내에서 은하수산이 유일하다.

앞으로 은하수산은 수산물 가공 유통업을 기반으로 한 식품종합회사로 성장해갈 것이다. 사업 영역도 더욱 다양화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사업부 분사와 관련 업종의 인수합병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 한다. 고부가가치 브랜드 개발로 수산가공사업의 고도화, 숙성회 관련 프랜차이즈 진출, 미래 먹거리를 위한 건강기능식품 사업, ASC 수산물 양식사업 재추진, 물류 창고업 등 사업구조 다각화와 수직계열화를 구체화하겠다. 은하수산에서 은하그룹으로 성장시키겠다.

※ 최영찬 - 선박과 플랜트 분야 제조업을 영위하는 선보공업의 차세대 경영인이다. 제조업체들이 스타트업 및 투자 생태계와 어떻게 공존하고 미래 사업을 만들지 고민하면서 선보엔젤파트너스와 기업 연합형 CVC인 라이트하우스를 창업했다. 200여 개 스타트업에 투자했으며, 컴퍼니빌딩 프로젝트와 기존 포트폴리오 기업을 공동경영 형태로 성장시키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창업한 2개 법인과 별도로 3개 프로젝트의 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면서 산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 _ 사진 최재승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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