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치미아진,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성지가 되다
[이상기 기자]
▲ 에치미아진 성당 정문: 성 그리고르 주교와 티리다테스3세 국왕 |
ⓒ 이상기 |
예레반 서쪽 20㎞ 지점에 에치미아진(Etchmiadzin) 성당이 있다. 에치미아진 성당이 위치한 바하르샤파트(Vagharshapat)는 아르메니아의 종교적 수도다. 그것은 이 도시에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성당과 교회가 네 개나 있기 때문이다.
에치미아진 성당, 성 흐립시메(Saint Hripsime) 교회, 성 가야네(Saint Gayane) 교회, 쇼하카트(Shoghakat) 교회. 그리고 이 도시 근교에 기둥만 남은 즈바로노츠(Zvartnots) 성당 폐허가 있는데, 이것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대주교가 주석하는 에치미아진 성모성당이다.
에치미아진 성당 입구에는 2001년에 만들어진 정문과 벽이 있다. 정문 위쪽으로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 양쪽으로 두 인물이 손을 내밀고 있다. 이들이 아르메니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 그리고르와 공인한 티리다테스 3세다. 301년 아르메니아 주교가 된 성 그리고르가 기독교를 공인한 티리다테스 3세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라고 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에치미아진 성당 |
ⓒ 이상기 |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똑바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끝에 높다란 돔이 우뚝한 성당 건물이 나타난다. 가는 길 왼쪽으로는 최근에 세워진 필사본 도서관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1874년에 세워진 고보르키안(Govorkian) 신학대학이 있다. 그리고 길가로 하츠카르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9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성당에는 또 세례 요한교회, 대주교관, 신부관, 세미나실, 출판인쇄소, 행정실과 식당 등이 갖춰져 있다. 에치미아진 성당 인쇄소는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받아들여 종교서적은 물론이고, 역사와 전통문화, 문학 관련서적을 출판했다.
▲ 남동쪽에서 바라본 에치미아진 대성당 |
ⓒ 이상기 |
그 후 주교좌가 드빈(Dvin)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십자가가 훼손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치미아진 성당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성지로 여겨져 성인들의 무덤이 계속 만들어졌다.
1200년대 몽골의 침입, 맘루크(Mamluk)로 불리는 튀르키에 왕국의 침입으로 아르메니아 왕국이 시련을 당하자, 당시 시유니크(Syunik) 지역 대주교였던 오르벨리안(Stepanos Orbelian)은 에치미아진 성당을 슬퍼 비탄하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 쟝 샤르뎅의 그림으로 남아있는 1670년 에치미아진 성당 |
ⓒ 이상기 |
그러나 1627년부터 모세스(Moses) 대주교에 의해 성당의 돔과 지붕, 신부관 등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길과 성벽 모양의 높은 담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1650년대부터 서쪽 종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모습은 1670년대 이곳을 방문한 프랑스 여행자 샤르뎅(Jean Chardin)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1682년에는 규모가 작은 세 개의 종탑이 동쪽, 남쪽, 북쪽에 더 세워졌다.
1930년대 들어 소련당국의 종교탄압이 시작되었고, 1938년 4월 국가보위부에 의해 대주교인 코렌 1세(Khoren I)가 살해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8월에는 아르메니아 공산당이 에치미아진 대성당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성당은 외부세계와 단절된 채로, 20명 정도의 인원으로 현상유지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7년 후인 1945년 9월 성당은 다시 문을 열었고, 게보르크 6세(Gevorg VI)가 새롭게 대주교로 선출되었다. 1950년대 들어 성당에 대한 발굴과 보수가 이루어졌고, 해외 아르메니아계 기업가의 후원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공인과 축성 1700주년이 되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대대적인 수리와 축하행사가 열렸다.
▲ 에치미아진 성당의 돔 |
ⓒ 이상기 |
벽의 색은 회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17세기에 수리하면서 붉은 계열이 추가되었다. 입구에서 성당을 향해 들어가면 가장 먼저 보이는 부분이 확장된 동쪽 성당벽이다. 벽의 모양과 창문을 통해, 가운데 주랑이 있고 양쪽으로 측랑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쪽 방향에는 출입구가 없어 자연스럽게 북쪽으로 향하게 된다. 성당 가운데 돔은 남쪽과 북쪽에서 잘 볼 수 있다. 그것은 종탑에 가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돔은 12각 원당형으로 올라가다 원뿔형 꼭지점으로 수렴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사도 바울과 성녀 테클라 부조 그래픽 |
ⓒ 이상기 |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전파와 포교에 앞장선 사람이고, 테클라는 바울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한 귀족 집안의 처녀다. 이들 부조의 윗부분에 이름을 적은 헬라어가 보인다. 왼쪽이 테클라고 오른쪽이 파울로스다. 그리고 원 안에 헬라식 십자가를 양각하고, 비둘기 두 마리가 양쪽에서 십자가를 감싸고 있다.
▲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상 |
ⓒ 이상기 |
▲ 내외부 수리중인 에치미아진 성당: 왼쪽에 주교관, 오른쪽에 고보르키안 신학대학이 보인다. |
ⓒ 이상기 |
그러나 그것은 그가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중요한 것이 노아의 방주 파편이다. 후대에 이 파편을 십자가 한 가운데 넣어 역사성과 종교성을 가진 십자가가 만들어졌다. 그 외에 사도와 성인 관련 유물이 있다.
에치미아진 성당은 아르메니아 사도교회의 중심이어서,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 세계 아르메니아인이 꼭 한 번 방문하려는 순례지일 뿐 아니라, 외국 관광객에게는 아르메니아 제1순위 관광지다. 에치미아진 성당은 아르메니아인이 나라를 잃거나 수난을 당했을 때 민족적 종교적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에치미아진 성당이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주교좌 성당이 정치상황에 따라 여러 번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치미아진 성당은 천 년 이상 아르메니아 종교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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