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의원 후원금은 7.5억, 신인은 1.5억뿐…기울어진 선거법 [기득권 선거법 1]
‘등록한 의원 후보자는 자유로이 선거에 관한 선전을 할 수 있음.’
1948년 3월 17일 공포된 미 군정 법령 제175호 29조.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선거인 5월 10일 총선거를 앞두고 미 군정이 선거 관리를 위해 제정한 이 법령의 선거운동 규정은 자유로운 선거운동에 방점이 찍혀 있다. 당시 선거운동 제한은 공무원의 선거운동과 유권자 금품 매수뿐이었다.
“자유로운 선거운동”을 규정한 최초의 선거법 이후 75년이 흐른 지금의 공직선거법은 선거운동을 제한하는 누더기 조항들로 빼곡하다. 그중 공직선거법 59조에서 ‘선거운동 기간’을 정하고 254조에서 사전선거운동을 범죄로 처벌하는 게 핵심이다. 원칙적으로 선거일 120일 전 예비후보자로 등록한 이후에만, 그나마 각각 제한된 범위 안에서만 허용한다.
이런 규제 위주의 선거법은 해외 민주주의 국가에선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발간한 ‘각국의 선거 제도 비교표’에 따르면 영국은 선거운동 기간은 정하지만 사전선거운동을 제한하진 않는다.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미국에선 자연히 사전선거운동 제한도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선거운동과 관련해 여러 통제수단을 두는 국가는 사실상 한국이 유일한 셈이다.
선거법이 ‘선거운동 자유 금지법’이란 오명을 쓴 채 한국 정치 발전을 가로막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58년 선거법 개정이었다. 일본 선거법을 따라 사전선거운동을 금지한 건 물론 연설회·선전물 등 금지·제한 조항 대부분이 이때 생겼다. 1956년 대선에서 신생 진보당 조봉암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자 1958년 총선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여당인 자유당과 제1 야당인 민주당의 이해가 일치한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헌법학회장을 지낸 송석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선거운동 규제 입법의 연원’(2005) 논문에서 “새로운 세력의 진입을 막으려는 여야의 공통된 의도”라고 지적했다.
선거법이 사전선거운동을 엄격히 금지해 정치 신인의 손발을 묶고 있는 사이, 현역 의원은 사실상 기득권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선거법 111조의 의정활동 보고가 대표적이다. ‘의정보고’란 형식으로 자신의 활동 내용을 유권자에게 알릴 수 있는 현역의원은 4년 내내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우회로를 확보한 셈이다. 선거법엔 선거운동 기간뿐 아니라 단체 문자 발송 횟수 제한 등 다른 규제도 가득한데, 현역은 의정 활동을 이유로 이런 규제를 대부분 피해갈 수 있다. “의정 보고는 선거법을 피할 수 있는 마법”이란 게 정치 신인의 푸념이다.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며 선거법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은 꾸준히 제기돼 왔다. 하지만 현역 의원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선거법이 국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외려 기득권을 강화하는 규정은 쉽게 통과하곤 했다. 국회 밖에서 기득권 타파를 주장하던 이들도 직접 금배지를 달고 나서는 별다른 개혁 성과를 내지 못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현역과 경쟁하는 정치 신인은 현실 정치 ‘머니 게임’에서도 차별을 받고 있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한 경우 1억5000만원의 후원금 모집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역 의원은 선거와 무관하게 매년 1억5000만원씩 모금이 가능하고, 선거가 있는 해엔 한도가 3억원으로 늘어난다. 애초 자금 동원 규모가 다른 것이다.
국민의힘 소속 정치 신인은 “이름을 알리려면 지역구에 현수막이라도 붙여야 하는데 그것만 해도 큰 돈이 든다”며 “현역 의원이 절대적으로 강한 게 조직력인데, 그 조직력의 원천은 결국 돈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정치 신인에겐 공직선거법이 ‘시간의 장벽’이라면, 정치자금법은 ‘금(金)의 장벽’인 셈이다.
현역 의원은 세금으로 월급을 주는 보좌 직원을 9명 둘 수 있다. 상당수 의원은 이들 중 일부를 지역구 사무실에 상주시키며 지역구 관리 역할을 맡기고 있다. 보좌진 채용 단계부터 ‘선거에 열정을 갖고 근무하실 분’을 자격요건에 써놓기도 한다. 21대 국회가 개원한 2020년 5월 30일 이래 국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채용 공고 중 자격 요건 또는 우대 사항에 ‘선거’를 적어놓은 공고만 63건에 달한다. 현역은 사실상 세금으로 365일 선거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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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현행법의 지나친 편파성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장승진(정치외교학) 국민대 교수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한 선진국 중 한국처럼 선거운동 규제가 강한 나라는 없다”며 “미국처럼 선거운동 금지 기간을 없애고 선거운동 규제 역시 ‘해도 되는 것’이 아닌 ‘하면 안 되는 것’으로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종철(헌법학)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재의 기득권 양당 체제가 굳어진 것도 결국 신인에 배타적인 기득권 야합의 결과”라며 “규제를 푸는 게 정치 개혁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 당원명부 안주고 당원행사서 ‘철저 배제’…신인은 서럽다 [기득권 선거법 上]
「 #.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상당수 국민의힘 당협위원회는 당원 교육(연수) 행사를 열었다. 당원 수백명이 실내 공간에 집결하는 건 기본이고, 유원지나 해안가에 모여 단합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내년 4·10 총선 승리를 다짐하는 당협위원장의 발언 시간이었다.
#.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 신인 A씨는 최근 출판기념회를 앞두고 당원들에게 초대 문자를 돌리려다 관뒀다. A씨는 “우리 지역 당원이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연락처도 알 수 없다”며 “문자 발송 비용이 한 건당 최소 10원이 드는데, 허투루 쓰는 것 같아 그냥 SNS를 통해 출판기념회 개최 사실을 홍보했다”고 말했다.
4·10 총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정치 신인의 발걸음도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 신인들은 “당내 경선도 현역 ‘위원장’에 비해 신인에게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각 당은 지역구별로 당원협의회(국민의힘)나 지역위원회(더불어민주당)를 구성해 ‘위원장’을 임명하는데, 이들은 지역 사무실을 열고 당원을 관리하면서 중앙당 주관 행사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을 수도 있다.
특히 당원 명부에 접근하는 건 ‘위원장’의 특권으로 꼽힌다. 정당법 제24조에 따라 각 당의 시·도당은 당원명부를 관리하고, 이 명부는 선거관리위원회 확인 요청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접근이 극히 제한된다. 이러한 벽을 넘을 수 있는 사람은 당헌·당규에 따라 열람권이 보장된 당협(지역)위원장 등 극소수다.
현재 국민의힘과 민주당 모두 공직 후보자 선정을 위한 경선 때 일정 기간 당비를 납부한 책임당원(국민의힘) 혹은 권리당원(민주당)의 참여를 보장하고 있다. 당원이 유권자인 셈이다. 자연히 당협(지역)위원장은 당원 명부를 활용해 누가 유권자인지 알기에 개별 접촉이나 맞춤형 공략이 가능하지만, 정치 신인은 '깜깜이 선거운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현역 위원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다. A씨는 “결국 신인이 할 수 있는 건 길에서 명함을 나눠주는 것뿐”이라고 토로했다.
의정보고회, 당원 간담회, 당원 교육 등에서 스킨십을 해온 위원장과 달리 정치 신인은 당원에겐 ‘낯선 이방인’일 가능성도 크다. 인천 지역구 출마 예정인 민주당 소속 B씨는 “당원이 모이는 지역 행사장에 가도 사회자가 지역위원장 눈치를 보느라 소개도 안 해준다. 초청장을 보내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원외 신인은 예비후보 등록(선거일 120일) 이전엔 홍보 현수막도 걸 수 없는 등 얼굴과 이름을 알릴 기회도 봉쇄돼 있다. 헌법재판소가 180일 전부터 금지했던 기존 현수막 조항을 헌법불합치 결정하자 여야가 금지 기간을 두 달 단축하는 생색만 내곤 금지는 유지했기 때문이다. 반면 당협·지역위원장은 ‘정당·정책 홍보’ 명목으로 개수 제한 없이 상시 걸 수 있는 특권을 누린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현행 선거법 제도는 인력과 자원, 인지도를 가진 현역 위원장과 맞붙어서 신인이 승리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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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영ㆍ성지원ㆍ전민구 기자 kim.ju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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