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상실의 시대
어린 환자들을 진료할 때 흔히 겪는 일이다. 항생제 오남용이 심각하기에 필요 불급한 약은 처방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보호자들은 예외 없이 말한다. “약이 한 가지뿐인가요?” 그 약 하나만으로도 아이의 증상에는 효과적이다, 굳이 다른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거듭 설명하고 안심시켜주어도, 보호자들은 매우 불안해한다. 그간 의료계가 항생제·해열제·진통제·소화제·신경안정제를 섞어주는 식의 산탄식(散彈式) 처방을 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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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이 적으면 불안해하는 환자
약 의존증 키워온 의료계 책임
의사에 대한 신뢰 상실로 연결
의사·환자는 서로 비추는 거울
」
이는 온전히 의료계의 책임이다. 자연면역보다 약 효능에 기대려는 국민 정서를 만들어 온 셈이다. 진료 후 받아든 투명한 약봉지에 형형색색의 약이 보이지 않고, 덩그러니 하나 혹은 두 개의 알약만 있을 경우 대다수 환자는 ‘상실된 약’에 불안해한다.
‘운동 전후에서의 수(number)’를 시간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가 없다면 시간의 존재도 없다고 했다. 인류 문명이 일어난 이후 시간은 존재의 지속적인 경과라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그 의미는 요지부동이다. 인간의 생명이 불가역적인 이유이다. 다만 삶의 무게가 저마다 천차만별이니 노화의 시간도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유한한 삶에서 노화로 인한 상실의 시간은 필연적이지만 건강한 생각과 일상적 운동을 통한 엄격한 자기 관리로 인체의 시간적 퇴행을 늦추는 것은 이제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연적 목표가 되어가고 있다. 상실의 시간에 대응하는 인간의 유효한 대응전략이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상실되어가는 육체를 염려만 할 뿐이다. 자기 관리 없이 현대의학에 기댄 치료는 불안전할 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붐을 일으킨 『상실의 시대』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잘살아보세’ 구호 아래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격변의 현대사를 거쳐오며 정치적 객관성과 공정성을 확보하려 했던 지난 세대 청춘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속에 나도 있었다. 기존의 유교적 혹은 집단적 관성이 흐물흐물해지고 새로운 가치를 탐색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루키의 ‘상실’ 키워드는 절대 공감을 얻어냈을 것이다.
소설을 빼곡히 채워나가는 희망과 이념, 죽음과 이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직면하지만 속절없이 상실의 아픔으로 끝없이 되풀이된다. 소설 속 사연을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꼈을 독자들은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하긴 하루키 자신조차도 이 책을 ‘사실주의’에 입각해 썼다고 밝히고 있으니 글이 주는 체감 온도는 심한 감기몸살의 발열 같았을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이데아적인 ‘아미료’ 요양소는 적절한 노동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사는 삶, 서로를 도우며 이해하는 사회, 규칙적인 생활, 저마다의 공간을 침해하지 않은 채 공감의 문을 여는 곳이다. 그들은 서로를 돕는다. 딱히 내색하지 않고도 알게 모르게 말이다. 서로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세상의 획일적 잣대로 상대를 규정하는 것도 금물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이시다 레이코는 “다른 곳에선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이죠.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렇지만 여기서는 서로가 도와요. 우린 서로의 거울이고, 의사도 우리와 같은 동료죠. 곁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필요하구나, 하고 느껴지면 어느새 다가와서 도와주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도 해요”라고 말한다. 요양원에 오기 전 극심한 좌절감을 겪었던 환자들이 어떻게 상실의 시대를 건너가는지를 협력 치료를 통해 그려 낸다. 그 동력은 공감과 신뢰다.
각자의 분투만으로 극단적 경쟁의 시대를 살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규정화된 시선에서 이탈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양성은 사라지고 이기적 개인주의는 확장을 거듭한다. 그런 가운데 끝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바이러스 창궐의 시대를 거쳐오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는 고통을 겪었다. 현대 인류가 이룬 첨단문명도 결국에는 생존에 얼마나 취약한지 경험했기에 상실은 더 이상 사전 속 단어가 아닌 현실의 문제라고 느꼈다. 그러나 여전히 공감과 연대의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의사들은 진단한 병을 고치고 증상을 없애기 위한 시술이나 약을 찾는 데에만 머물러선 안 된다. 환자 스스로 일상 속에서 질환을 관리할 수 있도록 세밀하게 신경을 써줘야 한다. 환자의 일상을 돌봐주는 관리 능력과 책임이 치료 과정에 수반되어야 한다. 환자의 권리는 신장하고 있고 의사에 대한 신뢰는 상실되고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윤리적인 신뢰를 획득해야 한다. 하루키가 그려 냈던 ‘아미료’의 의사와 환자들처럼 서로의 거울이 되어야 하고, 질병에 맞선 미더운 동료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온갖 질병에 아파하는 상실의 시대에 의학이 추구해야 할 지혜이다.
안태환 의학박사·이비인후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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