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란의 쇼미더컬처] 100년 만의 낯선 귀환, 덕수궁 돈덕전 즐기기
“○○야, 이것 봐. 대한제국이라고 보이지? 이게 조선이 없어진 뒤에 우리나라가….”
“첨단 디지털 나라가 됐어요?”
추석 연휴에 덕수궁 돈덕전 나들이 갔다가 우연히 엿들은 어느 관람객 모자의 대화다. 최근 개관한 돈덕전 2층 외교실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주제로 구한말 서양 열강과의 잇단 수교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벽면에서 ‘자주외교’ 노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어린이 눈에 ‘제국’이란 단어는 디지털제국쯤 돼야 어울리나 보다. 실제로 전시실을 휘감은 미디어아트를 보노라면 망국의 설움을 딛고 대한민국이라는 ‘첨단 디지털 나라’가 탄생한 게 기적 같다. 아펜젤러·언더우드와 같이 초기 외교사의 주요 인물 액자를 2층 복도에 걸면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처럼 윙크하는 실감영상으로 꾸민 재치가 돋보였다.
감흥은 여기까지. 신장개업 식당처럼 북적대는 돈덕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이걸 새삼 왜 지었지?’ 의아해졌다. 알려진 대로 돈덕전은 고종 즉위 40주년에 맞춰 당시 황궁이던 경운궁(덕수궁) 안에 지은 서양식 영빈관이다. 2년 간 공사로 1903년 개관했지만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제 기능을 상실했고 1921~1926년 사이에 일제에 의해 헐렸다.
고작 20년 남짓 존속한 공간이 문화재청의 덕수궁 복원정비사업에 포함됐는데, 고증 자료가 부족해 ‘복원’ 대신 ‘재건’으로 노선을 바꿨다. 1905년 미국 대통령의 딸(앨리스 루스벨트)이 방한 당시 머물렀다는 등 역사적 의의를 강조하지만 그게 200억원 재건비용에 값하는지 의문이 남는다.
되레 현재 건물의 방점은 1층 기획전시실 ‘박람회의 역사 소개’에 놓인 것 같다. 2012년 열린 여수세계박람회와 조선이 처음 참가했던 시카고 만국박람회(1893) 등을 열거하면서 2030 부산엑스포 유치를 기원하고 있다. ‘문화교류와 공공외교의 공간’이라는 재건 활용 방안이 정부 시책에 맞춰 직설적으로 반영됐다. 실제로 3층 건물 내부 구성도 고증보다 현실적인 전시·행사 활용에 맞춰졌다. 붉은 벽돌과 오얏꽃 문양 등 20세기 초 건축 외관만 복제한 채 황실의 사랑방은 껍데기로 돌아왔다.
차라리 그래서 좋다. 구한말 외교사를 구구절절 곱씹고 각성해야 할 이들은 지금 대한민국 운전대를 잡은 정치인·관료들 아니던가. 그러니 돌아온 돈덕전을 21세기 스타일로 즐기자. 고풍스러운 타일과 조명을 배경으로 이른바 ‘경성룩’ 인증샷도 멋지겠다. 바로 앞 석조전에서 황제의 가배(커피) 체험행사도 신청해보자. ‘과거는 낯선 나라’라는데, 100년 전 비애를 이미 극복한 세대가 허세와 호사를 만끽한들 어떤가. 나오는 길에 아이와 나무, 새의 화가 장욱진 회고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을 들러봐도 좋다. 지나간 시절 우리 자화상은 이곳에 더 생생하다.
강혜란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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