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천의 컷 cut] 자신의 눈과 귀에 속지 않는 법
‘내가 취재한 게 팩트(사실)일까?’ 기자를 시작한 지 20년쯤 지났을 무렵, 거대한 의문부호와 부딪히게 되었다. 실제 일어난 사실은 겉으로 드러난 상황과 다를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다. 그때부터다. 취재하고 기사 쓰는 일이 무서워졌다. 영화 ‘베니스 유령 살인 사건’을 보며 그때 그 기억이 떠올랐다. (※다량의 스포 있음)
영화의 주인공은 탐정 에르큘 포와로. 베니스에서 평온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던 그에게 추리 소설 작가가 찾아온다. 작가는 “영혼을 현실에 불러내는 심령술사가 있다”며 그를 강령회에 초대한다. 강령회가 열린 곳은 유령의 저주를 받았다는 저택이다. 저택에서 숨진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심령술사 입에서 흘러나오지만 포와로에겐 얄팍한 속임수다.
그런데 심령술사가 끔찍한 죽음을 맞으면서 공포감이 저택을 덮친다. 문제는 합리적 추론으로 미스터리를 해결하려는 포와로의 눈에도 유령이 보인다는 것이다. 진짜 유령의 저주인 걸까. 반전은 포와로가 자신이 환각에 빠져 있음을 알아차리면서 시작된다. 그는 어떻게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었을까. 자기 자신마저 직시하면서 그 배후의 진실을 파헤쳐내는 집중력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요즘 저마다 반향실(echo chamber)에 갇혀 그걸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듯하다. 포털과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은 이제 당신과 나의 눈이고, 귀다. 나를 둘러싼 것들이 환상이요 환청일 수 있다는 걸 알아야 빠져나올 수 있는데, 우린 반향실의 검은 동굴 속으로 끝없이 들어가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 자신의 믿음을 정당화하면서.
“진실이 밝혀지면 평범한 집일 뿐이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저택을 나온 작가는 포와로에게 말한다. 현실의 사건들도 환각의 밤이 지나고 나면 평범한 팩트들이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눈과 귀를 의심해보는 자세인지 모른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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