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IT YOURSELF! 매니시한 슈트를 즐기는 법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떠들썩하게 값비싼 것들을 찬양하는 럭셔리 패션 산업에 ‘조용한 럭셔리’의 바람이 불어닥쳤다.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것들을 기발한 방식으로 내놓고, SNS에서 타인의 시선을 끌어야 했던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흐름. 그리고 이 때문일까? 이번 시즌, 조용한 럭셔리의 대표 아이템이라 할 수 있는 슈트가 메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게다가 소비자의 니즈와 반응 또한 뜨겁다. 쇼핑 플랫폼 매치스패션의 2023 가을 시즌 바잉 보고서에 따르면, 작년 대비 정장 구매율이 208% 성장세를 보였다고 하니, 슈트가 유행과 소비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숫자로 증명된 셈이다. 코로나19 시대가 끝나고 오피스로 복귀한 여자들의 선택을 받은 것일 수도, 아니면 다가올 경기 침체를 예상해 디자이너들이 실용적인 아이템을 전략적으로 선보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또 어떤가! 이토록 다채로운 슈트가 우리를 반기고 있으니 우리는 그저 입고 싶은 디자인을 마음껏 선택하면 된다.
가장 무난하게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시킬 에센셜한 팬츠 슈트부터, 유행의 궤도 위로 올라온 스커트 슈트 그리고 트렌디한 쇼츠와 매치하는 진보적인 방법까지 있다. 그중에서도 쇼츠 슈트는 마이크로 쇼츠부터 버뮤다팬츠까지 다양한 길이의 쇼츠와 함께 조합됐는데, 재킷과 팬츠의 스타일과 실루엣, 길이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코페르니는 해체주의적 디테일의 빅 재킷에 마이크로 쇼츠를 더해 유니크한 매력을 끌어냈다. 재킷 안에 감춰질 쇼츠를 염두에 둬 단추를 장식하는 프런트 컷 라인을 과감히 사선으로 마무리한 점도 돋보인다. 비슷한 듯 다른 발렌티노의 스타일링도 흥미롭다. 정갈한 재킷 안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낸 크롭트 셔츠는 슈트의 정중한 매력을 중화한다. 페라가모는 보다 관능적인 실루엣에 집중했다. 미니스커트 슈트에서 착안이라도 한 듯, 몸의 라인을 드러내는 블레이저에 마이크로 쇼츠를 레이어드한 것. 포멀한 소재를 사용해 격을 끌어올린 아이디어도 남다르다. 쇼츠 슈트는 몸매를 자연스레 드러내면서도 적당한 예의를 갖출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셀러브리티의 사랑을 받아왔다. 과거 패션 모멘트로는 1990년대 개봉한 영화 〈귀여운 여인〉의 줄리아 로버츠를 예로 들 수 있다. 레드 재킷과 버뮤다팬츠를 근사하게 소화한 모습이란! 근래에는 지지 하디드와 젠데이아 콜먼이 있다. 지지는 NBC 모닝쇼 〈투데이 쇼〉에 출연하기 위해 브랜든 맥스웰의 베이지 버뮤다팬츠 슈트를, 젠데이아는 2023 루이 비통 가을 쇼에 참석하기 위해 애니멀 프린트의 쇼츠 슈트로 멋을 냈다. 디자인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를 지니는 쇼츠 슈트의 특성상 단순히 한 시즌의 짧은 유행으로 끝나진 않을 것 같다.
타이트한 테일러드 재킷에 힙라인을 강조하는 H라인 스커트가 조합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스커트 슈트가 아니다. 또한 메건 마클이나 케리 워싱턴이 즐기던 유니폼의 형태와도 거리가 멀다. 어깨너비의 2배는 될 법한 널찍한 재킷과 홀쭉한 허리를 강조하는 스커트를 조합한 새로운 형태다. 고전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예술적 형태에 쏠린 시선은 자연스레 현실적 고민으로 이어진다. 모델이라서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닐지, 혹은 리얼웨이에서 도전했다 어깨 깡패 소리나 듣는 것은 아닐지. 그럼에도 계속해서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근사하기 때문일 거다. 1980년대의 슈트를 표방한 파워 숄더 재킷은 작은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안토니 바카렐로가 제안한 생 로랑의 스타일링은 큼직한 재킷과 섹시한 슬릿 스커트도 모자라 보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때론 레더 글러브까지 더했다. 책이나 영화에서 만난 섹시한 여성의 표본이다. 역사가 반복되듯, 패션 트렌드도 동시대 디자이너들에 의해 재조명받는다. 1900년대 영국 패션 하우스 존 레드펀이 소개한 치마 정장이 1934년 랑방의 재해석으로 주목받고,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 시대 흐름을 기민하게 파악했던 샤넬과 디올의 손길에 의해 패션 역사에서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아이템으로 자리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유행의 포문은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가 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21 F/W 시즌 재킷을 굵직한 벨트로 묶어 연출한 방식이 지금의 역삼각형 실루엣의 시작이었다. 2년이 지난 후 프라다는 어깨가 과장된 재킷과 미디스커트로 다시 돌아왔다. 크롭 톱의 유행에서 착안해 보다 다른 시각을 제안한 발렌티노, 아빠의 옷장에서 훔쳐 입은 것만 같은 커다란 재킷을 선보인 발렌시아가, 잘록한 허리 라인의 블레이저를 내세운 돌체앤가바나 등 드라마틱한 스커트 슈트가 런웨이를 가득 메웠다. 아직은 낯선 형태에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패션 피플들의 도전 욕구를 자극하기 충분하다.
오늘날의 슈트는 권위적인 이미지를 드러내기보다 현재와 미래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슈트는 스타일링의 기호이자 취향을 대변하는 수단이다.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슈트 디자인으로 딱 떨어지는 재킷과 팬츠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남성적인 디자인의 슈트를 입어야 남자와 동등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번 시즌 팬츠 슈트의 활용 범위는 그 어느 때보다 넓다. 구찌와 아크네 스튜디오, 알렉산더 맥퀸, 스텔라 맥카트니, 스포트막스는 오버사이즈 재킷에 헐렁한 팬츠로 젠더리스 감성의 슈트를 선보였다. 노젠더를 표방한 큼직하고 네모난 실루엣 안에 살짝 부드러움을 첨가하는 식. 어깨 라인의 각이 반듯하게 살아 있는 것을 고려하면 1980년대 파워 숄더를 표방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끌로에와 페라가모, JW 앤더슨은 여성의 실루엣을 아름답게 살린 디자인으로 1990년대 스타일을 일부 복각했다. 날렵하고 섹시한 실루엣에 커리어 우먼의 당당한 애티튜드를 곁들였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하던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1970~1990년대의 트렌드를 적절히 믹스한 프라다의 슈트도 눈에 띈다. 스커트 슈트의 역삼각형 실루엣에 발맞춘 것으로, 오버사이즈 재킷에 시가렛 팬츠를 매치한 해석이 새롭다. 쿨하게 즐기고 싶다면 미우치아 프라다와 라프 시몬스가 제안한 스타일링처럼 셔츠 단추를 과감히 가슴 아래까지 풀어 헤쳐보는 것도 방법이다. 지금의 디자이너들은 매 시즌 선보이는 슈트를 어떻게 하면 좋은 퀄리티로, 어떻게 새롭게 어필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브랜드의 가치를 제외하고도 제품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을 수 있어야 슈트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다. 지금 우리는 다른 어느 때보다 단순하게 각자의 취향을 탐구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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