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이 된 장소, 베로나 #여행예술

이경진 2023. 10.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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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에서 만난 20세기 건축가 카를로 스카르파.

VERONA

베로나를 유명하게 만든 건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이 살던 집이라 여겨지는 작은 건물일 것 같다. 좁은 카펠로 거리에 사람들이 늘 북적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희곡의 배경이 된 집에 이토록 열광하는 건 극적인 러브 스토리 때문일까? 기차를 타고 오느라 점심이 늦었지만, 만토바에서 만난 친구 조반니가 추천해 준 ‘리스토란테 그레피아(Ristorante Greppia)’를 찾아가는 길은 왠지 기대로 가득했다.

작은 골목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풍미가 느껴진다. 시금치 라비올리와 로제 와인 한 잔을 곁들였는데, 그 조합이 느릿한 여름 오후에 템포를 더해준다. 이탈리아 음식에 대한 조건 없는 신뢰에 정점을 찍을 만한 맛이었다. 달콤한 젤라토 한 스쿱을 손에 들고, 무리 지은 사람들과 반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적지는 카를로 스카르파라는 이탈리아 건축가를 만나기 위한 ‘카스텔 베키오 뮤지엄’. 14세기에 지어진 성채로 베로나 도심 동쪽과 아디제 강을 연결하는 다리를 포함한 거대한 요새다.

붉은 벽돌의 거대한 성채는 한여름의 대기 안에서 화염처럼 이글거린다. 많고 많은 유럽의 성 중에서 이곳이 특별한 건 카를로 스카르파라는 20세기 건축가 때문이다. 1950년대에 대대적 레너베이션과 뮤지엄을 위한 공간 구축이 그의 손에 의해 이뤄지는데, 옛 성채의 위엄과 스카르파의 터치가 만난 풍경이 가히 절묘하다. 복원에 걸린 시간은 장장 10년이었다. 뮤지엄의 성화와 패널들은 스카르파가 만든 좌대나 철제 프레임에 매달려 전형적인 벽이 아닌 공간으로 나왔다. 스카르파 특유의 디테일과 장인적 공법은 유물을 보여주는 방식의 전형성을 깨뜨리고 새로운 긴장감을 자아낸다.

가느다란 메탈 패널에 걸린 500년 전의 성화, 석재 패치워크, 미니멀한 창으로 끌어들인 빛, 그리고 그걸 받아내는 콘크리트의 음영들. 덕분에 만테냐와 피사넬로, 루벤스의 묵직한 그림들이 전례 없는 가벼움을 얻은 듯하다. 베네치아의 유리공예가에서 건축으로 전향한 인물, 개인적 성향에 몰두하면서 금속과 석재를 두부 자르듯 주무르며 경계와 틈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 건축가. 스카르파는 생의 말년에 우연히 방문한 일본의 한 포목점 계단에서 넘어져 객사했다. 그토록 극적인 마침표라니. 스카르파의 생애와 건축을 다룬 두툼한 책 한 권을 정독하면서 가슴 뛰는 감흥과 그의 인생에 대한 상상이 휘몰아쳤다. 38℃를 기록하는 도시의 오후 3시, 몸은 녹아내릴 듯하지만 머릿속은 새로운 여정으로 명쾌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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