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선우예권

정소진 2023. 10. 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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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하다가 어느 순간 높은 파도로 거대해질지 모르는 잔잔한 물결 같은 선우예권의 선율.
재킷과 팬츠, 스커트, 슈즈는 모두 Dior Men. 네크리스와 이어 커프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 전국 투어 리사이틀 공연과 신보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 Rachmaninoff, a Refleciton〉 준비를 병행했습니다. 바쁘게 움직이는 경험이 본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A : 가능하면 바쁘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긴 합니다. 하지만 바쁜 게 좋은 작용을 하기도 하죠. 압박감을 받으며 무언가를 몰아서 처리하면 예상치 못하게 더 좋은 결과가 나올 때도 있고, 한층 더 성장해 있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경험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비교적 바쁜 순간을 즐기는 타입인 것 같아요.

Q : 스튜디오 앨범은 〈Mozart〉 이후 3년 만인데요. 〈라흐마니노프, 리플렉션〉은 어떤 의미를 담은 앨범일까요

A : 올해가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이라는 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라흐마니노프라는 작곡가와 인연이 깊은 것 같습니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제게 우승을 안겨준 작곡가이죠. 제가 만 15세쯤 유학을 떠났을 때 처음 배운 세이무어 립킨 스승님께서도 라흐마니노프 곡으로 콩쿠르에서 우승하셨고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에 대해 정서적으로 혹은 감정적으로 노래하는 방법을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항상 가슴 뜨겁게 느끼는 작곡가죠.

Q : 부제 ‘리플렉션(Reflection)’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A : 신보를 만드는 과정은 스스로 돌아보는 과정이었어요. 유학생활하던 내 모습, 립킨 선생님과의 기억, 당시의 경험이 떠올랐으니까요. 그래서 부제로 ‘리플렉션’이라는 단어를 붙였습니다. 모습, 반사, 반성, 굴절 등의 뜻을 지닌 단어죠. 내 모습이 거울처럼 반사돼 비친다는 표현일 수도 있고, 시기별 제 모습이 담겨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저라는 사람 자체가 들어간 앨범이죠.

Q : 녹음 과정은 어땠나요

A : 부비동염과 편도선염을 동시에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웃음). 열이 엄청 났죠. 코 주변이 헐어 있는 상태로 스튜디오로 향했고, 이틀 동안 75분가량의 곡을 녹음했습니다. 심지어 무대에서 연주하지 않은 곡들이 대부분이었죠. 함께 작업해 준 최진 감독님과 유니버설 뮤직 팀과 회의하며 나온 의견이 ‘아픈 상황을 연주에 살리자’는 것이었어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의 작품이었다면 그럴 수 없겠지만, 라흐마니노프의 곡에는 처절한 감정이 서려 있는 부분이 많아 제 상태를 살려 녹음했습니다.

Q : 그렇게 골라낸 곡들은

A : 총 6개 곡으로 채웠습니다. 라흐마니노프가 남긴 2개의 변주곡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42’와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22’가 첫 번째와 마지막을 채우고 있습니다. 중간 트랙들은 대중적으로 인지도와 인기 있는 작품으로 채워졌죠. ‘첼로 소나타 G단조, Op. 19: 3악장: 안단테’, 라흐마니노프가 직접 편곡한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모스크바의 종’이라는 부제로 유명한 ‘전주곡, Op. 3 중 2번’ 등으로 구성됩니다. 1번과 6번에 무게감 있는 곡이 있기 때문에 2~5번 트랙은 라흐마니노프라는 작곡가를 더 알고 이해하면서 들을 수 있는 흐름으로 구성했어요.

Q : 새 앨범이 완성된 이후 바로 들어봤나요

A : 아니요. 듣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어요. 녹음 당시 내 모습이 회상될 것 같아 마주하기 두려웠어요. 하지만 그런 모습 또한 내 것이고, 그런 과정 덕분에 시간이 흘렀을 때 또 성장한 내 모습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마주하지 않는 것 자체가 발전을 막는 길이니. 스스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던 앨범이기도 합니다.

Q : 어떤 기대감을 갖고 듣길 바라나요

A : 슬픈 감정을 표현했지만 모든 사람이 슬프게만 듣지는 않겠죠. 누군가는 처절한 슬픔으로 듣겠고, 누군가는 가슴 아린 잔잔한 슬픔으로 들을 겁니다. 본인이 듣고 느끼는 그대로 해석하는 게 맞아요. 다만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온전히 느껴달라는 것입니다. 멜로디 라인마다 순간순간의 우여곡절과 환희, 다양한 감정 표현이 담겨 있거든요. 그게 아픔이나 행복감, 즐거움, 어떤 감정이든 느끼고 즐기길 바랍니다.

Q : 라흐마니노프의 의도와 정서를 고민하며 그에 대해 새롭게 깨닫거나 공감대를 느낀 지점이 있었을까요? 어릴 때 느꼈던 것과 지금 녹음하며 느낀 게 어떻게 다른지

A : 많이 다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했으니 늦게 시작한 거죠. 특출한 영재의 경우는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표현할 줄 알고 빨리 곡의 감상을 느끼지만 저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터득했어요.

Q : 어떤 방식으로 곡을 이해하는 방법을 터득했나요

A : 막연하게 있는 그대로의 노트만 쳤고, 실수 없이 연주하기 위해 연습밖에 할 줄 몰랐어요. 음악을 들었을 때 ‘이게 왜 감동적이라는 거지? 가슴으로 느끼는 감동이란 게 뭘까?’ 스스로 질문했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듣는 방법을 몰랐던 것 같았요. 2~3년간의 고충을 립킨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연습실에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 공연을 듣는 시간을 더욱 늘리라”고 하시더군요. 다른 장르나 다른 악기의 음악을 자주 경험하다 보니 어느 순간 음악을 듣는데 가슴으로 딱딱 느껴지는 순간들이 생겼습니다.

니트 톱은 Brunello Cucinelli. 이너 웨어 셔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 립킨 선생님의 조언 덕분이군요

A : 미세한 소리까지 연주하는 법은 지금도 탐구 중입니다. 신보 첫 번째 트랙의 변주곡은 제가 열여섯 살 때 립킨 선생님이 직접 시범을 보여준 곡이에요. 방 안에서 선생님이 들려주던 소리가 머릿속에 계속 감돌았죠. 그래서 녹음할 때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연주를 흉내 내려고 했던 것도 같습니다.

Q : 지금까지 지켜온 것은

A :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도록 계속 불을 지피는 것. 아주 익숙한 곡은 그만큼 노력을 기울이지 않게 되죠. 때로는 곡을 잘 알기 때문에 소홀히 넘어갈 수도 있고요. 하지만 아무리 잘 알거나 덜 아는 곡이라도 음악에 처음 애정을 가졌던 순간을 회상하며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열정을 쏟아붓고 철저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Q : 요즘 음악도 듣나요

A : 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올 팍의 ‘Christian’에 중독돼 있었어요. 노래가 정말 좋더라고요. 블랙핑크 노래, BTS 정국의 ‘Seven’도 좋아합니다. K팝은 대단한 것 같아요. 요즘은 흥이 나는 음악들만 들으려고 해요. 지난해까지 끝없는 슬픔이 휘몰아치는 음악만 찾아 들었죠. 이문세의 노래부터 ‘사랑..그 놈’ 같은 곡도 듣고요. 요즘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조금 밝아진 것 같아요.

Q : 한 인터뷰에서 ‘감정을 오롯이 느낀다’고 이야기한 적 있죠

A : 그렇죠. 슬픈 상황을 마주하면 어떤 사람은 회피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하지만 저는 울적하고 슬픈 감정을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최대한 직면하려고요.

Q : 연주할 때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어떤 상상일까요

A : 건반을 안 보고 연주가 가능한 순간에는 눈을 감는 편입니다. 그러곤 상상하죠. 넓은 흰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색깔을 펼칩니다. 그렇다고 색깔을 이미지화하지는 않지만, 머릿속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몇 주간 연습을 안 하면 바보가 된 것처럼 머리가 멈춰 있는 느낌이다가 다시 연습을 시작하면 활기가 돌아요.

Q : 연주자에게는 공간적 요소를 비롯해 환경도 중요할 것 같은데

A : 울림이 많은 공간을 좋아해요. 울림이 덜한 것보다 지나친 것이 좋습니다. 넘치는 울림은 덜어낼 수 있지만, 없는 울림을 불러일으키기는 어렵거든요. 그래서 성당처럼 높은 천장의 공간 혹은 갤러리를 좋아합니다. 그런 공간에서 연주하면 관객 입장에선 세밀한 표현이 웅웅거리는 것처럼 들릴 수 있어요. 그래서 싫어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는 해요. 언젠가 명동성당에서 공연한 적 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신성한 기운이 감돌고 울림이 충만했죠. 고즈넉한 자연과 함께하는 공간에서 연주해 보고 싶습니다. 새 지저귀는 소리, 어둑한 밤이 오면 들리는 개구리 소리처럼 자연에서 오는 감동이 있기 때문입니다. 피아노 연주와 조화롭게 어우러지기도 하고요.

Q :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나요

A : 평생 그럴 일은 없을 듯합니다. 스스로를 많이 끌어올려 표현했다지만 아쉬움은 항상 있어요. 녹음된 내 목소리 듣는 것도 헐벗은 느낌이 드는데 연주를 듣는 건 말할 필요도 없죠.

Q : 나이가 들면서 연주나 음악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달라졌을지

A :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한 분야에 몰두한 장인을 보면 긴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노력하죠.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지속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열정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 건 더 어려워요. 정경화 선생님, 백건우 선생님은 연세가 많아도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런 모습을 닮고 싶어요.

Q : 당신이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을 대변하는 단어는

A : 온전함, 영원함. 세월이 흘러도 빛을 잃지 않고 가치가 사라지지 않을 장르라고 믿어요. 다만 그걸 대변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네요. 영혼의 안식처? 저는 클래식을 고귀하다는 표현에 빗대고 싶진 않습니다. 이를테면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깊이를 비교할 순 없거든요. 그 어떤 것이 더 훌륭하고 덜 좋다고 표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Q : 스스로 어떤 연주자라고 생각합니까

A : 글쎄요. 잔잔한 물결 같은 연주자? 고요하고 서정적인 작품을 선보일 때 좋아해주는 분이 많아요. 개인적으로도 서정적인 표현이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 작품에서 좀 더 완성도가 채워지는 것 같아요. ‘잔잔한 물결’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단조로울 수 있지만 단조로움 안에서 흐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그 잔잔한 물결이 큰 파도를 일으킬 수도 있죠. 모든 방향성과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레더 셔츠는 Neu_in. 링과 이어 커프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 피아노만큼 좋아하는 게 있나요

A : 없습니다. 피아노 외에 그나마 좋아하는 게 있다면 맛있는 음식 먹으러 다니는 것, 집에서 빈둥거리며 가만히 있는 것(웃음).

Q : MBTI를 물어봐도 될까요

A : INTP예요(웃음). 최근에 해보니 또 바뀌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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