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을 '본다'는 것, 동물원은 지금
WRITER 박소영은 13년 차 기자이자 8년 차 캣맘. 동물권 에세이 〈살리는 일〉, 비건 이슈를 다룬 〈청소년 비건의 세계〉 저자다. 그의 동생이자 함께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하는 박수영은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때때로 단편영화를 연출한다. 현재 두 사람은 〈자매 일기〉(출판사 무제)를 집필하고 있다.
한 동물보호단체가 구조한 사육곰들의 이름을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웅담’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뜬장에 방치돼 있던 곰들에게 이름이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한껏 고무된 채 틈만 나면 곰들의 이름을 생각했다. 곰들에게 인간이 지어주는 이름 따위가 무슨 대수겠냐마는, 인간 동물에게 이름 짓는 일은 큰 의미가 있다. 이름은 그들의 남은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의 다른 말이기도 할 테니까. 그건 내가 구조한 동물들과 길에서 만나는 고양이들을 이름으로 부르려 애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모 게시글에 여러 번 댓글을 남겼지만, 내가 지은 이름은 끝내 채택되지 않았다. 곰들에게는 이름만 생긴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뜬장이 아니라 해먹 위에서 뒹굴고, 음식물 쓰레기가 아니라 신선한 과일을 먹는다. 그로부터 약 석 달 뒤, 구조단체로부터 사육곰 두 명(命, 목숨 명 자를 사용했다)을 추가로 구조할 예정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건 말하자면 곰들의 이름을 지을 기회가 또 다시 찾아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야호!) 예민한 성격 탓에 활동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육곰 S1의 사연을 읽고 떠오른 이름은 단 하나. 천천히 거닌다는 뜻의 ‘소요(逍遙)’였다. 나는 S1이 마음 놓고 곰숲을 거니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 이름을 추천했다. 그리고 S1은 정말로 소요가 됐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기뻤던지, 저녁 내내 엄마를 붙잡고 뜬장을 벗어난 반달가슴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보름 전쯤 엄마가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푸바오 동생들도 이름 공모한대. 거기도 보내봐.’ S1이 소요가 돼 기쁜 이유는 단순히 내가 추천한 이름이 채택됐기 때문은 아닌데. 나는 평생 일련번호로 불렸을지도 모를 반달가슴곰들이 각자 성격과 개성에 어울리는 이름을 갖게 됐다는 사실에 감격했던 것이다. ‘푸바오 동생들도 물론 귀하고 소중하지만, 이름 짓는 일에는 동참할 수 없어.’
우리가 중국에 지불하는 판다 한 명의 ‘임대료’는 1년에 약 13억 원. 판다 한 명을 평생 돌보는 데 드는 비용은 40억 원이라고 한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즉각적으로 떠오른 건 사육곰들의 얼굴이었다. 뜬장에 갇힌 채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 반달가슴곰들에게는 결코 쓰일 수 없는 돈이라서. 돈은 ‘돈이 되는’ 동물들에게만 허락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관심을 쏟아야 하는 건 돈이 되지 않는 동물들이어야겠지. 그래야 동물들이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다행히도 몇 년 전부터는 야생동물들을 ‘구입’해 좁은 곳에 가두고 전시하는 일을 야만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타자를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행위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하게 된 일화가 있다. 우리 집 고양이 식구 수가 늘면서 그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일에 어려움을 느낄 때가 많다. 변기 한쪽 귀퉁이에 있던 무른 변이 누구의 것인지, 현관 앞에 사료를 토해놓은 고양이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이 없어서, 나는 할 수 없이 집 곳곳에 홈 카메라를 설치했다. 문제는 고양이 식구들이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 우리 집 둘째 고양이 ‘석수’는 구조된 이후 몇 년 동안은 사람 가족이 외출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신나게 ‘우다다’ 달렸다. 마무리로 캣타워 맨 위에 올라가 ‘어웅’ 하고 포효 비슷한 것도 했다. 석수를 의젓하고 과묵한 고양이라고 멋대로 판단해 버린 탓일까. 석수는 신나는 모습을 우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갑자기 시작된 인간 동물과의 동거생활에 말 못할 애로점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수가 달리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 뒤로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홈 카메라가 석수의 영역을 침범하고 자유 시간까지 침해하는 것 같아서.
집에 있는 고양이를 홈 카메라로 보는 게 왜 문제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석수의 자리에 인간을 대입해 보면 된다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비인간 동물과 인간 동물의 위계를 가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나는 석수가 원하지 않을 때 석수를 보고 싶지 않다. 그건 내가 누군가의 관찰하는 시선을 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동물원의 문제는 동물원이 단지 그들의 육체를 가둔다는 데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인간의 ‘보고 싶다’는 욕망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대체로 보고 싶은 것을 그저 보고만 싶은 것으로 남겨두지 않으니까. ‘보고 싶다’는 많은 경우 ‘만지고 싶다’가 되고, ‘만지고 싶다’는 곧 ‘소유하고 싶다’가 된다. 그리고 소유하고 싶은 것을 반드시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내 눈으로 탐험할 수 없는 영역이란 존재할 수 없고, 개척할 수 없는 영역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이 근대적 욕망이 지금 인류를 만들었다. 그 욕망이 우리와 동물을 둘러싼 관계를 어떻게 왜곡시킬지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좁은 우리에 갇힌 채 인간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동물을 보면서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철창 안의 동물은 동물다움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인간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외부의 방해를 피해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려 하지만 대체로 실패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그저 버티듯 살아낸다.
자연 상태에서 맞닥뜨리면 인간을 그저 한 줌 먹이로 만들 수 있는 맹수 앞에서도 우리는 ‘귀엽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장 안에 갇힌 무력한 신세이며, 우리는 그들을 안전한 거리에서 조망하고 있으니까. 동물원의 이런 특성이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하고 우리의 사고방식을 왜곡하지 않는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푸바오의 귀여움이 가리는 것들에 대해 종종 이야기해 왔다. 푸바오는 웃고 있고, 넘치게 사랑받으며, 그래서 행복해 보인다. 푸바오 주위의 사육사들은 진심으로 헌신하는 것 같다. 그들은 푸바오가 안전한 환경에서 보호받기를 원하고, 한국에 있는 동안 어느 때보다 즐겁게 지내길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히 그 사실 때문에 푸바오가 갇혀 있고, 늘 사람들의 시선에 놓이며, 나아가 돈벌이에 이용된다는 사실을 잊는다. 나라 간 우호 증진이라는 목적을 위해 물건처럼 건네졌다는 사실, 지금 이곳에 이송돼 오기까지 목숨을 걸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러니까 푸바오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푸푸바오가 지내는 곳은 비교적 자연친화적으로 보인다. 흙과 풀이 있고, 먹을 수 있는 대나무가 있다. 사육사들은 푸바오가 생활하는 곳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행동 풍부화를 진행한다. 지난 8월 우리를 벗어난 지 한 시간 만에 사살당한 사자 사순이가 지냈던 공간(공간이랄 것도 없었다. 4평 남짓한 황량한 시멘트 바닥에서 20년을 살았다)과 비교하면 푸바오의 생활환경은 썩 괜찮아 보인다. 그러나 이 자연친화적인 공간은 푸바오가 갇혀 있다는 것을 가리는, 치밀하고 정교한 장치일 뿐이다.
최근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데, 불과 얼마 전 동물원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친구가 자녀와 함께 푸바오를 보고 왔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푸바오를 너무 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 친구 앞에서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물을 사랑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보지 않아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저 멀리 어딘가에 나와 다른, 그러나 나와 같은 방식으로 존엄한 존재가 숨 쉬고 있다고, 닿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경이가 있다고 이제 우리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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