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속 베네치아’ 나룻배 타고 17세기를 즐기다

백종현 2023. 10. 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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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혼슈 주고쿠 지방 남단의 구라시키 미관지구. 일본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관광지다. 에도 시대의 옛 건축을 개조한 박물관과 카페,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가 강변을 따라 줄지어 있다. 한국에는 덜 알려졌지만 현지젊은층에게는 인기 높은 나들이 장소다.

2023년 현재 한국인의 1순위 해외여행지는 일본이다. 한국관광공사와 일본정부관광국(JNTO)의 집계에 따르면 1~8월 한국인 해외여행자 1417만 명 중 무려 432만 명이 일본을 찾았다. 해외여행에 나서는 국민 3명 중 1명이 일본 땅을 밟는 셈이다.

또 한 번 일본행에 나섰다. 이번에는 한국인으로 넘쳐나는 오사카·도쿄가 아니라 열도의 서쪽, 히로시마(広島)시와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품은 주고쿠(中國) 지방을 찾았다. 요약하자면 아직 한국인의 발길이 덜 닿은 숨은 여행지 탐방이다.

히로시마의 기억

히로시마 오리즈루 타워 전망대에서 한 연인이 원폭돔을 내려다보고 있다. 1945년 원폭 피해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장소다.

일본 최대 섬 혼슈(本州)의 서남단 끄트머리. 열도의 왼쪽 옆구리에 ‘주고쿠(中國)’라는 지명이 보인다. 주고쿠는 잘 몰라도 히로시마는 안다. 주고쿠 지방의 최대 도시이자 관문이 히로시마시다. 지난달 16일 오전 8시, 인천에서 1시간 30분을 날아가 히로시마 공항(인천에서 주 3회 직항편 운항)에 닿았다. 토요일인데도 기내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고, 공항도 한산했다. 의외였다. 지난 8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후 일본 여행에도 빨간불이 켜진 걸까. 현지 가이드는 “아직은 후쿠시마 지역이 아니면 크게 동요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오사카·도쿄의 경우 ‘일본말보다 한국말이 더 잘 들린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인 수요가 여전하다”고 말했다.

평화기념공원 한편의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

시내로 들었다. 히로시마를 대표하는 장소는 누가 뭐래도 평화기념공원이다. 여행지로는 낯설어도,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히로시마를 집어삼킨 기억만은 선명하다. 해리 트루먼(1884~1972) 전 미국 대통령이 경고했던 ‘파멸의 비’가 1945년 8월 6일 버섯구름과 함께 수많은 생명과 도시를 증발시켜 버렸다. 당시의 참상을 앙상한 뼈대로 증명해내고 있는 것이 공원 중앙의 원폭돔(옛 히로시마현 상업전시관)이다.

원폭돔에서 400m가량 떨어진 공원 한편에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공동 참배한 현장이다. 조선인 원폭 피해자는 대략 5만 명으로 알려져 있다. 위령비 옆에 마침 무궁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누가 다녀갔는지 비석 위에 한국민요 앨범이 놓여 있었다.

원폭의 그 날은 저마다 다르게 기억된다. 세계대전을 끝내는 마지막 행보로 해석하는 이도 있고, 재앙 혹은 평화의 상징으로 읽는 이도 있다. 96년 유네스코는 전쟁의 참혹함과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차원에서 원폭돔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참혹했던 과거와 찬란한 현재가 극명히 대비되는 터라 전 세계 여행자가 이곳으로 모인다. 원폭돔이 자리한 모토야스 강변을 산책하고, 제트스키로 누비고, 유람선 관광을 즐기는 현지인의 모습은 너무 일상적이었다.

낭만 소도시 기웃기웃

주고쿠 지방 남단에는 세토나이카이 해협과 크고 작은 섬들을 굽어보는 그림 같은 갯마을이 여럿 있다.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 오노미치(尾道)시도 그중 하나다. JNTO 관계자는 “한국인의 일본 여행 테마가 대도시 중심에서 소도시로 확대되면 단번에 인기 여행지 될 장소”라고 소개했다.

‘센코지야마 로프웨이’에서 본 센코지 사원과 오노미치 항구.

일본의 청춘이 오노미치를 여행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유람선에 올라 바다를 산책하듯 항구와 항구, 섬과 섬을 오가는 일이고 둘째는 자전거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페달을 밟는 일이다. 초행자에게는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쉬운데, 오노미치 철도역 인근의 ‘센코지야마 로프웨이’를 이용해 센코지산에 오르는 것이다.

해발 140m의 센코지(千光寺)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로 고작 3분 거리다. 높은 산의 단점을 굳이 꼽자면 발아래 풍경이 너무 아득해 현실감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센코지처럼 야트막한 언덕에서는 모든 풍경이 생동감 넘친다. 정상의 전망대에 오르자 항구와 바다, 철도와 유람선, 오래된 절집과 전통 가옥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히로시마 시내에 머문 이틀보다 오노미치에서 머문 반나절이, 케이블카로 탄 3분의 기억이 유독 더 낭만적으로 느껴진 건 결국 그 생생한 풍경 때문이었다.

센코지산 아래의 일명 ‘고양이 골목’.

센코지 비탈의 골목길은 이른바 ‘냥집사’의 성지로 통한다. 단순히 고양이가 많아서는 아니다. 돌담과 철문, 버려진 우물,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돌 하나에도 고양이를 새겨 넣은 앙증맞은 분위기 때문이다. 덕분에 골목에서 한참을 기웃거렸다.

오노미치에서 철도로 1시간 15분 거리에는 ‘일본의 베네치아’라 불리는 ‘구라시키(倉敷)’ 미관지구가 있다. 뱃길을 통해 상업이 발달한 운하 도시로, 17~19세기 에도(江戸) 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가옥과 창고가 박물관·옷가게·식당·카페 등으로 개조되어 손님을 맞고 있다. 우리네 경주 대릉원 일원처럼 마을 전체가 역사 지구이자, 관광지이고, 초대형 포토존이다.

박경민 기자

노는 방식이 특별하진 않았다. 나룻배 타고 유유자적 뱃놀이를 하다가, 기모노 차림으로 옛 골목을 활보하는 청춘을 구경했고, 사극에나 나올 법한 낡은 식당의 다다미에 앉아 끼니를 때웠다.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레몬우동을 먹고 나니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고전적 하루의 끝은 평온했다.

히로시마(일본)=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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