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 시선으로 읽은 ‘허수경의 처음과 끝’
허수경 지음
문학과지성사, 316쪽, 1만7000원
오은 시인은 한 칼럼에서 “내 마음속 달력을 펼치면 한겨울에는 아버지가, 한여름에는 황현산 선생님이, 한가을에는 허수경 시인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더는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사람들. “그리하여 계절이 바뀌면 그리워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10월이 되면 허수경을 떠올리는 이들이 있다. “허수경 시인의 한국어는 언제나 눈보라처럼 살아 있었고, 계절을 만나 핀 꽃과도 같이 절정의 순간에 있었다”고 문태준 시인이 말한 허수경의 문장들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허수경은 한국 시에서 잊혀지지 않을 여섯 권의 시집을 남기고 2018년 10월 3일 독일 뮌스터에서 암 투병 끝에 54년의 생애를 마감했다. 그가 떠난 후에도 그의 책들은 해마다 출간되고 있다. 1주기에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이 나왔고, 2020년 유고집 ‘오늘의 착각’과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 2021년 장편동화 ‘가로미와 늘메 이야기’ 개정판에 이어 2022년에는 세 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가 재출간됐다.
올해 5주기에는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가 꾸며졌다. 1988년에 발표된 놀라운 첫 시집 ‘슬픔만한 거름이 있으랴’부터 2016년 마지막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까지 허수경 시집 여섯 권 전부를 포괄하며 주요 작품 83편을 묶었다.
시선집에 수록된 시들은 젊은 시인들이 고른 것이다. 대부분 2010년대 이후 문단에 나온 시인 56명이 허수경의 시 중에서 두 편씩을 추천하고 각각의 시에 짧은 설명을 붙였다. 한 시인의 추모 선집에 이렇게 많은 시인들, 특히 젊은 시인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 시에서 허수경이 가진 존재감을 말해준다.
아마도 허수경의 얼굴도 본 적이 없을 젊은 시인들이 그리움과 경외감을 담아 쓴 산문들은 허수경 시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제공하고 허수경이 끊임없이 읽히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시를 읽고, 추천의 글을 읽으면, 다시 시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면서 시에 대한 이해가 한층 또렷해진다.
조용우 시인은 ‘물지게’라는 짧은 시를 고르고 “어떻게 이토록 맑은 물을 길어 올리고 빛의 근육을 빚어낼 수 있었을까”라고 찬탄했다. 이 글을 읽고 나면 무심하게 지나쳤던 “섬세한 빛 근육”이란 시구, 특히 “빛 근육”이란 말을 한참 들여다보게 된다.
“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인아, 하고 부를 때면 세상의 온갖 약한 존재가 한꺼번에 뒤돌아볼 것만 같다. 그 쓸쓸하지만 고고한 음성은 언제까지나 허수경의 것이다.” 임유영 시인이 ‘눈동자’라는 시를 추천하며 붙인 이 글은 시의 마지막 문장 “애인아, 이 저녁에 나는 당신의 눈동자를 차마 먹지 못해 눈동자를, 적노라, 라고”를 거듭해서 읽게 만든다. 임유영이 쓴 “약한 존재” “쓸쓸하지만” “고고한” 같은 단어는 허수경의 시 전체를 설명하는 키워드로도 손색이 없다.
가장 많은 시인들이 추천한 작품은 “사과나무 아래서 책을 읽었습니다, 책 제목…, 기억 나지 않네요,”로 시작되는 ‘여름 내내’이다. 여섯 명의 시인들이 이 작품을 중복 추천하며 각자 설명을 붙였는데, 시를 읽는 방법이 얼마나 다양한지, 하나의 문장이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시선집은 시집 출간 순으로 작품들을 배치해 허수경의 시 전체를 조망하게 해준다. 첫 시집에 실린 ‘폐병쟁이 내 사내’는 영원히 식지 않는 용암처럼 뜨겁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로 시작되는 ‘혼자 가는 먼 집’은 1992년 발표작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이 시로 “킥킥”이라는 의성어는 허수경의 목소리가 되었다.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끝끝내 서럽고 싶다/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
마지막 시집에 실린 ‘농담 한 송이’처럼 짧고 아름답고 비밀을 품은 채로 허수경은 떠났다. 문보영 시인은 허수경의 시에서 “사라지고 싶을 만큼 살기”를 읽어낸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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