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분산형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의 탄생
현대적인 은행 시스템 필요
1910년 6人 위원들 모여 논의
1913년 연방준비법 탄생
1913년 JP모건이 사망했고, 같은 해 의회 법안에 의해 연방준비제도(Fed)가 설립됐다. 사실상 최종대부자 역할을 했던 모건 대신에 진정한 중앙은행이 만들어졌다.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1832년 미국 두 번째 중앙은행을 무력화시킨 후 중앙은행 없이 미국 경제가 돌아갔다. 단지 중앙은행뿐만 아니라 잭슨 대통령의 은행 전반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연방은행법과 대부분의 주법에서 지점 설립을 강력하게 금지했다. 이미 고인이 된 잭슨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으로 미국 은행 시스템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천개의 소규모 은행으로 존재했다. 은행이 효율적 규모에 도달하거나 대출 포트폴리오를 다양화하기는 어려웠다.
본질적으로 취약한 단위은행 구조와 비탄력적 통화는 위기에 취약했다. 그러나 정치적 해결책을 찾는 것 또한 어려웠다. 대도시 은행과 소도시 및 농촌 지역 은행의 이해관계가 충돌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의 권리와 은행 시스템을 규제하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둘러싸고 오랜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1860년대 국가 통화의 대부분은 국립 은행(연방 정부가 발행한 헌장을 가진 상업 은행)이 발행한 지폐가 국가 통화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국립은행이 발행할 수 있는 지폐의 양은 은행이 보유한 미국 국채의 양에 따라 결정됐다. 특히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뉴스로 인해 은행 고객들이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으로 달려가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패닉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은행 시스템의 문제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널리 인식되고 연구되었지만 시스템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미국의 후진적이고 분산된 금융시스템에 불안해했다. 1907년 패닉은 모건의 개입으로 상대적으로 단기간에 끝났지만 후폭풍이 엄습했다. 건전한 은행과 기업들이 무너져 내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무엇보다 탄력적인 통화공급이 필요했다. 모든 계층과 모든 분야의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현대적인 은행 시스템이 필요했다.
1910년 11월 드디어 알드리치 등 6명의 위원들이 조지아주 해안에 있는 지킬 아일랜드 클럽에 모여 국가의 은행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한 방법을 논의했다. 회의와 그 목적은 철저히 비밀로 보호되었다. 참가자들은 1930년대까지 회의가 열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지킬 섬에서 만난 사람들은 은행 시스템이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믿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지킬 섬 참가자들의 견해는 잘 알려져 있다. 집회 전후에 몇몇은 공개적으로 연설했고 다른 참가자들은 이 주제에 대해 광범위하게 발표했다. 그들은 지킬 섬에서 작성한 계획과 통화위원회 보고서에서 그들의 우려를 종합적으로 요약했다.
많은 미국인과 마찬가지로 참가자들도 19세기에 주기적으로 미국의 경제 활동을 혼란에 빠뜨린 금융 공황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패닉은 평균 15년마다 발생했다. 이러한 패닉으로 금융 기관은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길고 깊은 불황이 촉발되었다. 미국 은행들은 많은 양의 현금 준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준비금은 전국적으로 분산되어 수천개의 은행 금고에 보관되었다. 위기 상황에서는 은행 금고에 얼어붙어 상황을 완화하는 데 사용할 수 없었다. 호황기에는 은행의 초과 지급준비금이 대도시, 특히 뉴욕으로 흘러갔다. 중개인은 주식 시장의 투자자에게 자금을 빌려주었고, 투자자의 주식 구매는 거래의 담보로 사용되었다. 이 미국 시스템은 은행 준비금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고, 주식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금융 불안정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유럽에서는 은행들이 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을 상인과 제조업체에 단기로 대출해주었다. 이런 형태의 어음은 상업과 산업에 직접적인 자금을 조달하는 동시에 은행의 위기 상황에서 신속하게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지킬섬 회의 참가자들은 미국 내 화폐 공급의 비탄력적 상황에 대해서 우려했다. 달러 가치는 금과 연동되어 있다. 그리고 이용 가능한 화폐의 양은 일련의 특별 연방정부 채권의 공급과 연관되었다. 가을 수확이나 휴일 쇼핑 시즌과 같은 현금 수요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통화 공급이 확대되거나 축소되지 않아 이자율이 매월 크게 달라졌다. 비탄력적인 통화 공급과 제한된 금 공급 또한 장기적이고 고통스러운 디플레이션을 초래했다. 이러한 문제적 상황에서 6인의 참가자들의 꼼꼼한 현황 분석과 논쟁의 결과로 1913년 연방준비법이 만들어졌다. 외딴 섬에서 작성된 계획은 결국 중앙은행인 Fed의 토대를 만들었다.
그동안 Fed는 그 형태와 기능 면에서 계속 발전했다. 모순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분산형 중앙은행’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Fed의 목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국 은행 시스템을 더욱 안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광범위한 은행의 지불 정지, 그리고 은행 파산으로 귀결되는 은행 공황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주 발생했다. 그러한 패닉은 국가의 ‘비탄력적인 통화’가 원인이었다. 개혁가들은 유동성에 대한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폐 공급을 신속하게 확대하는 방법에 몰두했다. ‘탄력적인’ 통화에 대한 열망은 궁극적으로 연방 준비은행의 창설과 새로운 통화 형태인 연방준비은행권으로 실현되었다. 연방준비은행권은 오늘날 미국 통화의 주요 형태이며 수요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금액으로 공급되었다.
여섯 명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노력으로 올드리치 브릴랜드 법이 제정되었다. 또 이 법에 근거하여 국가통화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후 1913년 Fed를 만들기 위한 연방준비법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 12월 의회가 법안을 통과시키고. 윌슨 대통령이 연방준비제도법에 서명했다. 마침내 중앙은행을 위한 정치적 해결책이 마련되었다. 이는 또한 주의 권리와 은행 시스템을 규제하는 연방 정부의 권한을 둘러싸고 새롭지만, 오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국가의 혼란스러운 은행 시스템을 개선하려고 했을 때, 특히 이미 약화된 경제에서 발생한 1907년 공황에 대응하지 못했다. 금융계의 거물 JP모건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훨씬 더 나빴을 것이다. 모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융의 전염병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그 여파로 많은 은행이 파산했다.
위기와 그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미국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실질적인 검토가 이루어졌다. 1908년 의회는 국가통화위원회(National Monetary Commission)를 설립하기 위한 법을 통과시켰다. 위원회의 임무는 최근의 공황 상태를 평가하고 통화 및 은행 개혁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로드아일랜드주 공화당 의원이자 주요 개혁가인 알드리치 상원의원은 1909년 뉴욕 경제 클럽 연설에서 패널의 사명을 설명했다. "과거의 정치적 편견이나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인물 앤드류 잭슨의 유령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미국민을 위한 최선의 시스템을 채택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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