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난 사람]"피눈물 흘린 전세사기 찐 극복기, 웹툰으로 그려 전세역전"
작품으로 써서 잘 헤어져
작품으로 제도 개선 도움 뿌듯
부조리 근절 서사 주인공 된듯해 기뻐
만에 하나를 대비하기 위해 정말 꼼꼼하게 전셋집을 골랐다. 등기부등본을 확인해 빚이 없는 집만 후보에 올렸다. 융자, 담보대출, 근저당 등을 살펴 혹시나 보증금을 떼일 수 있는 집을 배제했다. 불의의 사태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갈 경우 입주한 순서대로 보증금을 배당하는 다가구 주택도 피했다. 대신 집마다 소유주가 달라 ‘개별등기’가 가능한 다세대 주택을 고르고 골랐다. 전세보증금이 매매가 대비 합리적인지, 깡통전세, 역전세 위험은 없는지도 살폈다. 그 외 채광, 수압, 보안 등 여성이 혼자 살기 편한 환경을 고려한 끝에 ‘운명의 집’을 만났다. 하지만 그 집이 시련의 운명인 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든 임차인 통지서. 그 속엔 해당 집이 압류돼 경매로 넘어간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알고 보니 집주인이 여러 법적 분쟁 중이었고, 배상 판결을 받으면서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것. 거기다 집주인이 체납한 세금(1순위 변제)이 드러나면서, 세입자 루나(홍인혜)는 전세금을 떼일 위기에 처했다. 그 누구보다 꼼꼼하게 점검했고, 실제로 본인의 잘못이 하나도 없지만, 수억대의 전세보증금을 모조리 잃게 된 ‘전세사기’ 상황. 책 ‘루나의 전세역전(세미콜론)’은 악덕 집주인의 세금 체납액이 무고한 세입자의 보증금으로 치환되는 상황을 다룬다. 만화로 먼저 공개되고, 뒤이어 단행본으로까지 출간된 루나 작가의 전세사기 극복기, 그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
-‘루나의 전세역전’ 콘텐츠가 큰 관심을 받았다. 책을 내기 전부터 웹툰으로 주목받았는데, 소감은.
▲2021년 첫 만화 연재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너무 특수한 일이라 아무도 공감 못 하면 어쩌지!’라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큰 주목을 받았다. 생각보다 보증금에 관한 막연한 불안감을 가진 분들이 많더라. 이후 전세사기 이슈가 크게 번지면서 만화의 생명력은 더 길고 강해졌다. 창작자로서 또 전세사기 피해자로서 더 많은 분께 보탬이 되고픈 맘에 책으로까지 내게 됐는데, 이전 책들이 가족 안에서 하루 이틀 화제가 됐던 것과 달리,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게 돼 기쁘다. 사기에 얽힌 집을 처분한 지 1년이 됐지만, 지금도 가끔 먼 발치에서 바라보다 오곤 한다. 애증의 공간…. 수년간 절 괴롭힌 사건이라 잘 소화해서 떠나보내려고 했는데, 작품으로까지 잘 승화시켜 이제는 잘 헤어진 것 같다.
-책을 보면 정말 아무리 철저히 준비해도, 마음먹고 달려드는 사기꾼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 같다. 또 그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을 텐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내가 뭘 잘못해서?’ ‘내가 괜히 독립을 해서’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고 덕 없이 살아서’ ‘내가 원래 재수가 없는 인간이라서’ 등의 비관에 휩쓸렸다. 그러다 보니 이 사건이 내 돈을 위협하는 것을 넘어서 내 세계관을 바꾸고, 건강이나 일상까지 망치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하더라. 사기당한 것도 억울한데 성격, 일상, 인간관계, 건강까지 상하다니….‘확장피해’는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승부욕이 강한 편이라서 지지 않기 위해 버텼다. 싫어하는 운동도 몹쓸 인간에게 스트레스 받아서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갔다.
-위기 대응력이나 정신력이 강한 편인 듯하다.
▲만화 발표 이후 멘털 ‘갑’이란 말을 많이 들었는데, 실은 ‘을’ ‘병’도 아닌 ‘정’ 수준인 사람이다. 작은 일을 오래 붙잡고 걱정하고, 먼 미래에 관해 백 갈래로 망상하며 우울해한다. 그런 저에게 전세 사기는 최악의 사건이었다. 규모 자체가 큰일인 데다, 지병처럼 오래 갖고 있어야 하고, 미래 시나리오가 수백 갈래에 달한다니…. 정말 전사의 마음으로 버텼다. 멘털 약체에게도 자기보호 생존본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궁극적으로는 역대급 환란을 마주한 연약한 인간이 고난을 극복하는 ‘마음 모험담’을 쓰고 싶었다. 예민하고 유약한 사람의 발버둥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분들께 위로가 됐으면 했다.
-전세 피해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집을 낙찰받는 방법을 선택했다. 많은 망설임이 있었을 것 같은데.
▲주변 사람 모두가 ‘빌라는 처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매입을 추천하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큰돈이 언제 팔릴지 모를 부동산에 묶이니까. 하지만 전 고민 끝에 낙찰을 결심했다. 핵심은 ‘실제로 이 돈을 주고 살 만한 집인가’였다. 다행히 전세를 구할 때 집을 꼼꼼하게 골랐고, 3년 살아본 결과 집 자체가 나쁘지 않아 매수를 결정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전셋집을 구할 때 ‘경매로 넘어갔을 때 사들여도 후회 없을 집’을 보라고 한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겠지만, 그래야 혹시 모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부모님께도 사건이 해결된 뒤에 말씀드린 것으로 안다. 많은 이들이 알면 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힘든 일을 겪으면 주변에 하소연하고 위로를 받기 마련이지만, 전세사기 피해자는 그러기가 어렵다. 일단 법적 문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설명이 장황하기 마련이고, 대개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질문이 뒤를 잇는다. ‘그럼 전세금 날려?’ ‘쫓겨나?’ ‘너는 어떻게 돼?’ 당사자도 답할 수 없는, 두려운 부분이 건드려지면서 피해자는 점점 과묵해지기 마련이다. 앞서 법조인과 부동산 전문가들을 안 찾은 건 아니다. 다만 당시 인간 불신이 너무 심했고, 몇 년간 사건이 시시각각 변하는 탓에 결국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전세사기를 당한 친구들이 전세사기만 전문으로 하는 법조인들께 소송, 낙찰, 환수까지 일임하는 걸 보고, 다시 돌아간다면 나 역시 ‘의뢰’를 통해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어려운 상황에 처한 분이 있다면 돈을 좀 쓰더라도 대행을 맡겨 숨구멍을 찾는 게 낫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루나의 전세역전’이 많은 이에게 도움이 됐고, 또 제도개선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안다.
▲몇 달 전 법무부에서 개정된 임대차보호법을 소개하는 만화를 의뢰받았다. 지난 4월부터 임대인이 전세 계약 시 세금(납세증명서) 정보를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개인적으로 의미가 남달랐다. 진작 있었다면 사기에 휘말리지 않았을 제도지만, 이제라도 생겨 앞으로 저와 같은 피해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께서 법령 개선을 준비하면서 제 작품을 봤고 문제의식에 공감했다고 해주신 말도 무척 기분 좋게 느껴졌다. 평소 부조리를 개선하기 위해 고투하는 서사들을 보면서 감동했는데, 그 주인공이 된 것 같아 무척 뿌듯했다.
-전셋집을 얻으려 할 때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책을 보면 이른바 전문가들도 온전히 신뢰하기 어려워 보인다.
▲요즘 전세 사기 뉴스를 보면 사건마다 디테일이 달라 경악스럽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와 협업해서 전세 사기 사례를 소개하는 ‘전세사기예방툰’을 작업한 적이 있는데, 그때 언급된 방법만 8가지였다. 사실 ‘이것만 주의하면 사기 안 당한다’는 해결책은 없다. 그럼에도 의외로 ‘막연한 믿음’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중고장터에서 몇 만원짜리 물건을 거래할 때도 사기를 조심하면서도 수천에서 수억원이 오가는 계약 앞에서 ‘에이 설마’라고 생각한다. ‘설마 부동산이 실수하겠어?’ ‘법이 있고 제도가 있는데 내가 손해 보겠어?’ 사기는 이런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기 사례 중에 ‘집주인 행세를 하는 가짜 집주인’과 계약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건 등기부등본 이름과 집주인 주민등록증만 대조해봐도 충분히 거를 수 있다. 하지만 ‘설마 사기꾼이겠어? 주민등록증 보여달라고 하면 실례겠지?’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 사람의 심리다. 이런 부분에서 한 번 더 의심하고, 체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예방도 중요하지만, 불가피하게 상황이 벌어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건 멘털 관리다. ‘내 탓 하지 말기’가 첫 번째다. 사기 피해자는 자괴감을 갖기 쉽다. ‘속은 내가 잘못’이란 생각에 빠지면 이중고가 시작된다. 사기꾼도 미운데 그에게 속은 나도 밉다. 자신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전문가의 도움은 필수다.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로 돈과 시간을 들여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전문가만큼 사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대처법의 가닥을 잡아줄 사람도 없다. 주변 사람, 인터넷 카페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꼭 전문가를 찾아야 한다.
-등단 시인이자, 만화가, 작가다. 향후 어떤 콘텐츠로 만날 수 있는지.
▲‘루나의 전세역전’ 이전 작품은 대체로 호흡이 짧았다. 생활 만화는 몇 컷 정도였고, 칼럼이나 에세이도 길지 않았다. 시는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루나의 전세역전’을 통해 긴 호흡의 서사를 써나가는 데 큰 재미를 느꼈다. 독자가 제 연출에 울고, 웃고, 놀라고, 감동하면서 다음 화를 기다리는 모습이 짜릿하더라. 긴 이야기가 주는 울림에 매료됐다고 할까. 이런 긴 호흡의 인상적인 이야기를 선보일 예정이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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