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 5년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대"

조종안 2023. 10. 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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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대현 감독에게 듣는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예술 정책

오는 2024년 1월 6일은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 탄생 100주년 되는 날이다. 이에 관련 서적 출간, 다큐영화, 연극, 서사음악회 등 전국규모 행사가 다양하게 준비되고 있다.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마을(다음카페)을 운영해 오는 필자는 김대중 생애사진전(6월~8월)을 열었다. 오늘은 김대현 감독(인디라인 대표) 인터뷰를 통해 김대중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을 조명해보았다. <기자말>

[조종안 기자]

 군산 정담시네마에서 강좌 진행하는 김대현 감독
ⓒ 이가령
 
김대현(1965~) 감독은 경북 선산(구미) 출신으로 서울에서 초·중·고 졸업하였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진학 이후 사회운동에 관심 두기 시작한다. 전두환 군부독재가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던 시절 총학생회 기획부장으로 활동한다. 다양한 분야를 접하며 영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그는 동국대학교 대학원(연극영화과)을 수료한다. (관련 기사 : "파행 겪은 '금강역사영화제' 속히 재개돼야")

"80년대 많은 선후배가 학생운동을 했고, 저도 그 끝물에 쪼끔 발을 담근 정도였습니다. 학교 졸업하면 각자 다른 현장(직장)을 찾아갈 때인데 저는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 뛰어들어 버텨낼 캐릭터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대학교 4학년 때 8mm 워크숍을 했어요. 영화마당 우리였는데 그때 필름 맛을 처음 본 거죠."

사회변혁 운동의 하나로 영화를 선택한 청년 김대현. 그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그해 여름 작은 영화 워크숍을 통해 영화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 이후 한국적 정서가 담긴 다수의 리얼리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다. 그는 한국 영화가 정서에 맞아 선택한 케이스이지 '할리우드 키드'는 아니라고 말한다.

어려서부터 한국 영화를 즐겨봤던 그가 많은 영감을 얻은 작품은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8),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1975),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1975) 등. 특히 대학 졸업 앞두고 영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시기, 결정적인 계기가 돼주었다고 회고한다.

김대현은 신촌 우리마당 영화분과에서 활동하다가 1990년 3월 '영화제작소 현실(독립영화제작사)'을 차린다. 평소 사회변혁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의문사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룬 단편영화 <서울길>을 제작한다. 이 영화는 첫 작품으로 이듬해(1991) 대한민국창작단편영화제(부산국제단편영화제 전신)에서 우수동백상을 수상한다. 그해 나이는 스물일곱.

그는 '영화제작소 현실'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그러나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제작한 동료 감독 이상인이 경찰의 수배령으로 편집도 못 하고 피해 다니자 '영화제작소 현실' 전체를 편집실로 사용하도록 제공한다. 이후 독립영화의 배급까지 아우르고자 '영화제작소 현실'을 '인디라인'으로 바꾼다. 이때부터 오늘까지 십수 편의 다큐 독립영화와 장편영화를 연출하였다.

김대중 정부와 각별한 인연
 
 제1회 서울국제영화제 단체기념사진(맨 오른쪽이 김대현 감독)
ⓒ 김대현
 
1990년대 들어 소규모 영화제가 하나둘 생겨나면서 국제영화제 개최 논의도 일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 열리지는 못했다. 그 과정을 쭈~욱 지켜보던 김대현 감독은 1995년 자신이 대표로 있는 인디라인 주축으로 국제독립영화제를 기획한다. 독립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세계 독립영화의 흐름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게 목적이었다.

"제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가 12월 2일부터 8일까지 동숭동 예술영화 전용관 광장에서 열린다. <나마스테 서울> 등을 감독한 김대현씨의 인디라인이 주축이 되어 열리는 이 영화제에서는 오버하우젠 등 해외 유수의 단편영화제 수상작 20여 편과 국내의 주요 단편 20여 편이 상영된다." - (1995년 10월 14일 자 <한겨레>)

제2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는 1997년 12월로 잡혀 있었다. 그러나 문민정부 시절임에도 인권영화제가 중단되고 시민영화제 독립영화 상영이 봉쇄되자 항의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외환위기(IMF)까지 겹쳐 서울국제독립영화제는 이듬해로 연기된다.

김대현 감독은 일본문화 개방과 한류의 초석을 다진 김대중 정부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국내 극장에서 일본 영화를 상영한 최초 감독으로 기록돼서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다음 달(3월 6일~13일) 제2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가 열렸다. 개막 초대작은 재일교포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1993년)였으며, 이어 일본 영화 10여 편이 소개됐는데 그 주인공이 김 감독이었던 것.

"윤석열 정부는 위기에 처한 영화산업 현실 직시해야"
 
 2003년 제11회 춘사영화제 공로상 받은 김대중 대통령
ⓒ 김대중 대통령 군산기념사업회
 
김대중 대통령의 문화정책 원칙은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였다. 이는 대통령 취임 후 문화관광부 업무 보고받는 자리에서 맨 처음 한 말로 알려진다. 김대중 정부는 IMF 경제위기 속에 출범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투자는 난국을 벗어나는 지혜가 될 것'이라며 정부 재정대비 문화예산 비율을 1%로 올리고, 영화 제작에 1500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하던 해(2003) 12월 제11회 '춘사영화제'에서 영화인들이 주는 공로상을 받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 당시 주최 측은 '재임기간 중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를 지켰고 영화진흥 기금 1500억 원을 조성하는 등 한국 영화계를 전폭 지원했기 때문'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는 김 대통령이 재임 시절 국내 영화 산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의원 시절부터 '영화 필름에 가위질한다거나 소재에 제한을 두는 것은 창작을 간섭하는 행위'라고 주장해 온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재임시절 사전검열 및 규제를 없애거나 바로잡는다. 예전 정부 같으면 검열에 걸려 극장에서 상영되지 못할 <쉬리> < JSA 공동경비구역 > 등이 관객의 사랑을 받은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시대 서막에 실마리를 제공했던 것.

1999년 5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영화의 질적 향상과 국내 영화 및 영화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를 새롭게 출범시킨다. 그 후 예전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정책 및 사업들이 집행되었다. 아래는 김대현 감독 회고다.
 
 국민의 정부 시절은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였다고 말하는 김대현 감독
ⓒ 조종안
 
"김대중 정부는 정책 면에서 예전 정부들과 달랐습니다. 특히 영화제작은 재정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기관의 사전검열, 통제 및 압력, 간섭 등을 없앤 그 자체가 대단한 업적이자 최고의 영화 진흥 정책이었다고 봅니다. 광복 후 역대 우리나라 정부산하 기관은 영화 제작을 지원하기보다 간섭, 통제하고 검열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해왔기 때문이죠.

정부의 간섭과 통제가 사라지고 영화산업 분위기가 달라지자, 투자자도 다양해질 수밖에요. 노력과 능력에 따라 영화제작이 판가름 나자, 작가들도 시나리오를 열심히 짜고 창의적인 소재가 나왔던 것이죠. 매칭펀드를 많이 만든 것도 빼놓을 수 없죠. 정부에서 공적자금을 출자하고 여러 기업이 공동 출자하는 방식으로 한국 영화를 활성화한, 즉 매칭펀드가 마중물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겁니다.

한국 영화는 1990년대 중반까지 바닥을 찍었죠. 그러나 그 이후 기적적으로 살아납니다. 허준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이 1998년 개봉했고, 봉준호도 2000년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했으며,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과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도 2000년에 개봉하는 등 훗날 거장이 된 감독들 대부분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인 국민의 정부 때 등장했죠."

김대현 감독은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초과학이 융성해야 하듯, 수준 높은 영화가 만들어지려면 그 토양이 되는 독립영화가 풍부하게 제작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많은 젊은이에게 조금만 지원이 뒷받침된다면 우리 영화의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영화 산업이 발전하려면 감독들의 에너지가 분출되어야 한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영화산업이 부글부글 끓는 물처럼 활기차게 발전하려면 첫째 감독들의 에너지가 분출돼야 하죠. 요즘 들어 한국 영화가 쭈그러든 이유는 코로나 사태 영향도 있지만, 좋은 아이디어로 영화를 만들면 명화가 되고 투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보물 같은 아이디어와 소재가 많은데도 투자와 연결 가능성이 희박하니 모두가 움츠러든 거죠. 윤석열 정부는 영화산업이 위기에 처한 현 상황을 직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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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김대중 자서전>(2010),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김대중 리더십>(최경환 지음) 옛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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