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다 되는 세상... 뼈 때리는 32년 전 영화의 '무력감'

김성호 2023. 10. 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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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57] <킹 오브 뉴욕>

[김성호 기자]

▲ 킹 오브 뉴욕 포스터
ⓒ 일미디어
 
32년 만에 재개봉한 할리우드 누아르 영화가 있다. 한국개봉 당시 13분이 삭제된 채 상영했던 아벨 파라라의 역작을 온전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누아르 영화의 전성시대이던 1990년대로부터 한 세대를 건너 이 영화가 다시 조명된 이유가 무엇인지 관심이 쏠린다. 시간의 냉혹한 심판으로부터 오늘의 관객을 사로잡을 힘을 이 영화가 갖고 있을까 말이다.

<킹 오브 뉴욕>은 제목 그대로 뉴욕의 이야기다. 미국 최대 도시인 뉴욕의 뒷골목, 마약을 비롯해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에든 뛰어드는 악당들의 이야기다. 한 시절 마약왕으로 이름을 날린 프랭크 화이트(크리스토퍼 월켄 분)는 오랜 수감생활을 끝내고 출소한다. 프랭크의 출소날만 기다린 지미(로렌스 피시번 분)와 다른 부하들은 두려울 것 없다는 듯 날뛰기 시작한다.

프랭크가 자리를 비운 동안 뉴욕의 밤거리는 이탈리아와 중국계 갱스터들 차지가 되어 있다. 프랭크는 그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뉴욕을 다시 제 발밑에 두려 든다. 마약유통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주저하지 않는 프랭크 패거리를 보며 다른 이들은 공포감에 몸을 떤다.

뉴욕 경찰이라고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형사반장 로이(빅터 아고 분)는 제 부하들과 함께 프랭크를 추적한다. 데니스(데이비드 카루소 분)와 토마스(웨슬리 스나입스 분)는 그중에서도 손꼽는 열혈형사들이다. 이들이 밤잠도 쫓아가며 프랭크의 수하들을 검거하지만, 그들은 돈과 변호사들의 조력을 받아 금세 풀려나고 만다. 분노한 형사들과 이들을 자제시키려는 로이의 갈등은 보란 듯 범죄를 이어가는 프랭크 앞에서 폭발하고 만다.

어떤 누아르에서도 만나지 못한 이야기
 
▲ 킹 오브 뉴욕 스틸컷
ⓒ 일미디어
 
영화는 겁나는 건 무엇도 없다는 듯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프랭크 일당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특히 두목인 프랭크는 기존 할리우드 누아르 영화의 악당들과는 조금쯤 다른 모습으로, 제 악행을 이어간다. 피곤한 표정으로 뉴욕의 밤거리를 누비는 그는 좀처럼 보통 사람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그의 총구가 향하는 건 언제나 다른 갱단이다. 제가 없는 동안 온갖 범죄를 이어온 다른 조직 두목들을 참혹하게 살해하고는 저는 그보다는 낫다고 주장한다. 아예 대놓고 시장이 되고 싶다거나 재정이 열악한 병원을 후원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히기까지 한다. 다른 갱단 사람들은 그가 반쯤 미쳐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프랭크의 조직은 갈수록 세력을 키워간다.

공포 그 자체처럼 군림하며 가문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켜가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악당들과 비열하고 치졸하면서도 사람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마틴 스콜세지의 악당들,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해 다른 무엇도 돌볼 수 없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악당들과 아벨 페라라의 악당은 무척이나 달라 보인다. 음울한 분위기 가운데 거의 구도자처럼 제 길을 걸어가는 프랭크의 모습은 그를 쫓는 경찰조차 아연하게 만들 뿐이다.

<킹 오브 뉴욕>이 흥미로운 건 영화 속 경찰들이 법에 따라 프랭크를 수사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프랭크의 수하들이 번번이 법망을 빠져나오는 모습에 분개한 젊은 형사 데니스와 토마스는 로이의 만류를 뿌리치고 프랭크 조직을 일망타진하겠다 결심한다. 프랭크 조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첩보를 입수한 형사들은 복면을 쓰고 마치 다른 조직원인 것처럼 그들을 급습한다. 경찰과 갱단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 과정은 평범한 누아르 영화에선 만나기 어려운 충격을 던진다.

명배우들의 전성시대와 만나다
 
▲ 킹 오브 뉴욕 스틸컷
ⓒ 일미디어
 
<매트릭스>의 모피어스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은 로렌스 피시번과 <블레이드> 시리즈로 당대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한 웨슬리 스나입스가 서로를 죽이겠다 격투를 벌이는 신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만하다.

마이클 치미노 감독의 역작 <디어 헌터>에서 주인공 마이클(로버트 드 니로 분)이 구하려 했던 동료 닉 역할을 맡아 전 세계 영화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크리스토퍼 월켄은 <킹 오브 뉴욕>을 통해 제가 어떤 역량을 가진 배우인지를 입증한다. 이토록 멋진 연기로 가득한 누아르를 이 시대 시네필은 결코 놓칠 수 없는 일이다.

이 영화가 특별히 오늘 이 시대에 호응하는 이유도 언급해야만 한다. 최고의 누아르를 논할 때 빠지는 법이 없는 <대부> 시리즈며, 스콜세지와 드 팔마의 명작들에 비하여도 <킹 오브 뉴욕>에는 빠지지 않는 강점이 있다. 그건 오늘의 세상에 이르러 이 영화가 그리려 했던 어떤 낙담이며 무력감이 더욱 선명해졌다는 사실이다.

영화엔 프랭크의 연인 제니퍼(자넷 줄리안 분)가 꽤나 인상적으로 등장한다. 출소한 프랭크와 탄 지하철에서 맨 가슴을 드러내고 키스를 나누던 파격적 모습으로만 기억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실제로 그녀가 영화에서 맡은 역할의 중요도는 그 이상이라고 보아야 한다. 통상 이런 류의 누아르에서 여자는 성적 대상이나 이름 모를 피해자 정도로 그려지는 게 보통이지만 제니퍼는 다르다. 영화 곳곳에서 꽤나 인상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며, 프랭크의 오른팔인 지미보다도 주목을 받고는 하는 것이다.

32년의 시간을 건너 한국에 소환된 이유

그녀는 변호사다. 그것도 아주 유능한 변호사다. 경찰에 붙잡힌 지미를 보석으로 빼내는 것이며, 이 조직의 법률적 사무를 도맡아 처리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로이가 제니퍼를 찾아 정말 떳떳하느냐고 묻는 장면은 무척이나 많은 점을 시사한다. 누아르 영화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타락한 남자 변호사가 아닌 젊고 예쁜 데다 누구보다 공감력이 좋을 것으로 보이는 여성 변호사가 아무렇지 않게 법대로 하라고 형사반장을 돌려세우는 장면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감흥을 선사한다.

어느 화려한 식당에선 한 중년 사내가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살펴가며 엔화를 기준으로 화폐투자를 하겠다는 그의 말은 그가 월스트리트의 유능한 인물은 아닐까 상상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내 드러나는 그의 정체는 역시 어느 범죄자의 뒤를 봐주는 변호사다. 이러한 이들의 보조를 받은 범죄자들이 법을 제 편이라 여기는 모습은, 영화 속 열혈형사들의 좌절과 그대로 이어진다. 우리가 아무리 잡아도 법이 저들을 놓아준다는 호소가 이러한 열혈들을 절망하게 한다.

지난 수십 년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이 이와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한다. 변호 받을 권리를 이야기하며 전관이라 불리는 변호사들이 밝혀진 것만 수십억의 대가를 받고 민중을 등친 이들을 변호하는 광경은 더는 충격적이지도 않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포기하게 한 화이트칼라 경제사범들과 유사수신 업체들의 부흥, 단 몇 년 살고 나와 숨긴 돈을 찾아서는 떵떵거리는 이들의 모습들이 영화 속 프랭크를 향한 분노와 맞닿는다.

더는 공공을 위해 제 삶을 갈아 넣는 공직자를 만나기가 어렵다. 로이는 늙어 은퇴하고, 데니스와 토마스는 총을 맞았으며, 젊은이들은 오로지 제 삶만을 생각하며 불의를 외면한다. <킹 오브 뉴욕>에서 왕을 꿈꾼 프랭크가 오늘날엔 정말 꿈에 다가서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무력감이 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킹 오브 뉴욕>이 32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한국에 소환된 데는 이러한 이유도 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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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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