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효도가 공정한 거래일까요?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빅데이터에서 인간의 마음을 읽고 해석하는 마인드 마이너(Mind Miner)인 저자는 새롭게 등장한 '핵개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분석한다. 대상은 학벌 인플레이션, 돌봄 과도기, 투명 사회, 과잠 계급, 돌봄 과도기, 효도의 종말, 이연된 보상 등의 현상. 5분 존경 사회, 글로벌 계급장, AI 동료, 권위자와의 직거래, 마이크로 커뮤니티, 미정산 세대 등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핵개인 시대를 전망한다.
위로부터 아래로 억압적인 기제로 유지되던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 이제 개인이 상호 네트워크의 힘으로 자립하는 새로운 개인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 자연스럽게 기존에 힘을 발휘하던 권위가 쪼개지고 융합되는 과정, 새로운 인정 시스템을 통해 권위가 창조되고 보존되는 과정을 다양한 층위에서 관찰해 보았습니다. 효도의 종말과 협력 가족의 진화, AI 최적화 시스템 속에서 기존에 없던 존재인 새로운 개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임을 예견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개인을 ‘핵개인’이라 정의합니다. 그들이 어떤 사회구조적 변화의 맥락 속에서 탄생하는지 관찰합니다. 그리고 핵개인들의 연대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어떻게 모색하고 합의해 나가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핵개인의 시대에서 각자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언어력과 다양성의 포용, 그리고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에 관해, 생활의 현장에서 관측한 우리 삶의 생생한 발견을 여러분과 나눠보고자 합니다. - 「프롤로그」 중에서
서양의 개인주의가 인간다움, 인본주의의 연장선에서 발현되었다면, 한국의 개인주의는 권위주의의 반대 역학으로 돌출되었습니다. 1995년의 한 신문 기사를 보면 ‘개인주의 팽배로 사회 붕괴 우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당시 개인주의자는 악당의 다른 표현이었습니다. 20여 년이 지나 우리는 이제 건강한 개인주의가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논의를 자연스럽게 나누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게 결국 역학의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더 선진화된 것이 아니라 개인이 힘을 더 갖게 된 것뿐입니다. 집단으로 작동하던 생산 모둠의 집합 시스템이 개인 중심의 플랫폼 사회로 바뀌면서 기성세대가 생각을 수정하기도 전에 갑자기 힘의 흐름이 바뀐 것입니다. 굴뚝 산업이 IT 산업으로 전환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커지게 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젊은 층은 자신들의 번영과 생명력을 제한하는 그 모든 것을 ‘권위적’이라고 느낍니다. 앞으로의 핵개인들 은 ‘권위적이다’라는 말 자체를 더욱 혐오의 감정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 「제1장 ‘K는 대한민국이 아니다’」 중에서
조직에서는 중간관리자가 사라집니다. 이미 선도 IT 서비스 기업에서는 전업 관리자를 없애는 분위기입니다. 개발팀에서는 팀장도 코딩을 합니다. 업무의 진척도와 일정 같은 것들은 협업 툴이 모두 관리하기 때문에 전업으로 관리를 맡는다고 하면 팀원들로부터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냐고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차장님은 업무가 뭐예요?”
“내 업무는 일정 관리와 부서 간 업무 조율이지.”
이제 개인은 직접 배워서 AI의 도움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직은 프로세스를 정규화시킨 뒤에는 자동화시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리자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을 관리자라고 정의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제2장 ‘코파일럿은 퇴근하지 않는다’」 중에서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모 대기업 그룹사 입사 시험이 포스트 수능시험처럼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생 부모들조차 대놓고 ‘잘 키워서 대기업 보내고 싶다’라고 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기업은 대학 졸업자들의 경쟁의 종점이자 새로운 학벌이었습니다. 자녀가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었고 동년배들 사이에서 ‘그 친구 대기업 다니잖아’는 성공 레이스를 입증하는 증표로 인식되었습니다. 두 번의 금융위기를 겪은 탓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안정적인 일방향의 미래만 보고 싶어 했습니다. IMF 사태와 글로벌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순식간에 추락하는 삶을 목격한 보통 사람들은 외부 충격에도 쉽사리 부도나지 않을 것 같은 대기업 취직에 매달렸습니다. 치열한 토너먼트를 뚫고 대기업 명함을 받는 순간 고액 연봉으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훈장 같은 사원증을 목에 건 채 평생 보호구역에서 살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습니다. 수능이 마지막 시험도, 대기업 입사가 마지막 관문도 아닌 세상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 「제3장 ‘채용이 아니라 영입’」 중에서
소설 《가녀장의 시대》에서도 한국의 근대와 미래는 갈등과 타협을 반복합니다. 출판사의 직원이 반드시 어머니와 아버지일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더 경험 있고 전문적인 동료가 나을 수 있습니다. 만약 출판사가 더 큰 규모로 확장된다면 가족 경영처럼 보이는 구도에 새로운 직원이 합류하려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채용의 공정성이 과연 확보되었는지, 근무의 보상 금액이 적정한지도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그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안심하고 행복해합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생계를 위해서라도 사장이 아닌 딸의 입장에서 금전을 지원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백미는 그 관계성의 재정립입니다. 자립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일방적 지원은 부양자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계속된 지원을 받아도 그것을 당연시하는 부모는 자녀의 무력감을 양산합니다. 이 무력감에 대한 공포는 드라마 〈더 글로리〉 속 문동은의 어머니로 형상화되고, 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부양의무를 저버린 부모는 상속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민법 제1004조 개정안(상속권 상실 제도)’으로 구체화됩니다. 상호부조의 미풍양속은 어려울 때 서로를 돌보는 소중한 생존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커지고 각자 자립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야 할 단계에서도 여전히 사적 보조에 의해 각자의 미래를 돌보는 시스템은 또 다른 문제를 만듭니다.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묶는 ‘연좌의 빚’을 남깁니다. - 「제4장 ‘효도의 종말, 나이듦의 미래’」 중에서
한 분야 전문가가 갖는 권위는 어느 분야든 예전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권위의 정점인 메이저리그로 가고자 달렸다면, 이제는 자기 마당에 차린 아틀리에에서 장인으로 살기를 꿈꾸는 것 같습니다.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는 《파는 것이 인간이다》라는 책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세일즈를 해야 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팔아야 할까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나무의 나이테가 그러하듯 서사는 결코 급조될 수 없습니다. 오직 시간과 진정성으로 만들어집니다. - 「제5장 ‘핵개인의 출현’」 중에서
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 | 340쪽 | 2만1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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