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봄바람이 끊이지 않는 곳
명절 가족 예배 때 자주 불리는 찬송이 있다. 전영택 작사, 구두회 작곡의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찬송가 559장)다. 봄바람이 믿음의 가정에 끊이지 않는다는 가사 덕분인지 한국 그리스도인이 애송하는 곡이다.
‘늘봄’이라는 호를 가졌던 소설가 전영택 목사는 현실의 거침과 냉랭함, 심지어 죽음마저 넘어서는 온화한 기운을 글로 표현하곤 했다. 1925년 발표한 ‘화수분’의 주인공 이름은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라는 뜻의 화수분이다. 이름과 달리 그는 가난하고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 이 소설은 그가 아내와 꼭 껴안고 동사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는 암담한 현실에 비치는 생명의 빛을 놓치지 않는다.
“이튿날 아침에 나무장사가 지나가다 그 고개에 젊은 남녀의 껴안은 시체와 그 가운데 아직 막 자다 깬 어린애가 등에 따뜻한 햇볕을 받고 앉아서 시체를 툭툭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어린것만 소에 싣고 갔다.”
나무장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이가 이후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 부부의 시체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 없다. 대신 결말은 삶을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찬바람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한 부모의 체온, 추위와 어둠을 몰아내고 아이를 보듬은 아침 햇볕. 이러한 따스함이야말로 연약한 우리를 지탱하는 생명의 신비가 아닐까. 거친 세상에서 희망은 물질적 풍요나 안정이 아닌 사랑의 온기에서 자람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는 그러한 사랑이 샘솟는 곳으로 ‘믿음의 가정’을 삼는다. 이 곡이 등장한 1960년대 대한민국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고 정치적으로 혼란했다. 하지만 1970~80년대 산업화와 민주화 덕분에 점점 더 많은 이가 풍족하고 안정적으로 살게 됐다. 대신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은 줄고, 가정이 담당하던 교육의 상당 부분이 학교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는 인구증가 속도를 늦추고자 가족계획도 진행됐다. 출산율을 낮추고자 정부와 국민이 함께 힘썼던 만큼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같은 기발한 구호도 유행했다.
반세기 전과는 매우 다르게 오늘날에는 핵가족 비혼주의자 딩크족 등 여러 삶의 형태가 공존한다. 역설적으로 전통적 가족 개념이 해체되는 현대사회에 두드러지는 현상은 ‘가족의 절대화’다. 몇몇 사회학자는 가족 구성원 수가 줄고, 현대인이 안정적 삶을 추구하며 ‘이상적 가족’이 숭배 대상이 됐다고 지적한다. 그래서인지 가족의 이익과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부정의가 용납되고 타인에 대한 폭력은 정당화되는 일이 적잖게 일어난다. 최근 언론을 떠들썩하게 한 일부 학부모들이 교사들에게 보여준 ‘갑질’도 왜곡된 가족주의의 발현인 경우가 많다.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가사처럼 믿음 안에서 가족은 ‘즐거운 동산’이 되고, 서로를 보살피면 초가집도 ‘천국’처럼 변모하며, 온 식구가 밥상에 둘러앉는 곳이 ‘낙원’으로 경험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에게 가정은 불편한 곳일 수도, 심지어 타인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논리를 제공하는 곳일 수도 있다. ‘가족은 마땅히 이래야만 한다’는 당위적 접근, 그리고 타인의 존엄에 무관심한 ‘내 가족주의’가 삶을 일그러지게 한다. 사회의 변화 그리고 개개인의 필요와 감정에 반응하려는 노력 없이 혈연적 가족을 천국의 모형으로 여기다 가족 자체가 종교처럼 돼 버린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막 3:35)라고 하셨다. 혈연적 가족 개념을 해체하는 도발적 상상력을 주님께서 주신 만큼 믿음의 가정은 현대사회에 공존하는 여러 삶의 형태를 포용하는 온화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사명이 혈연적 가족에 한정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도 냉랭한 세상에 봄바람을 불어 잇는 새로운 믿음의 가족이 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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