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국군의날 시가행진은 ‘병정놀이’가 아니다
지난달 26일 서울 도심에서 건군 75주년을 기념하는 국군의날 시가행진이 열렸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설 장거리 요격 미사일 L-SAM, 유사시 지하 벙커에 숨은 적 지휘부를 타격할 수 있는 고위력 탄도미사일 등이 이날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주한미군 330여 명도 동참해서 한·미 동맹의 굳건함을 보여줬다.
이날 시가행진은 10년 만이었다. 2013년이 마지막이었는데, 원래 5년마다 여는 게 원칙이었다. 매년 시가행진을 치르는 게 번잡하고 예산도 들기 때문에 매 5년으로 정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5년이 돌아온 2018년 건군 70주년 시가행진을 걸렀다. “국군의날 행사 때마다 장병들이 시가행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당시 북·미 비핵화 협상이 한창이었기에 무력시위로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속내였다. 싸이와 걸그룹의 공연이 시가행진을 대체했다.
■
「 5년마다 개최, 10년 만에 부활
진보진영 “전쟁 연습인가” 비판
민주국가도 전차 등 도심 행진
국민에 대한 충성과 안보 다져
」
북한 의식해 행사 거른 문 정부
문재인 정부는 아예 ‘시가행진 청산’이라는 대못을 박으려고 했다. 5년 주기로 남대문·광화문 또는 테헤란로에서 도보·기계화부대의 시가행진을 하도록 규정한 부대관리 훈령 제313조(대규모 행사)에서 2019년 4월 관련 조항을 다 들어낸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시가행진을 되살렸다. 그러나 불편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참여연대·녹색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지난달 26일 시가행진 대열과 멀지 않은 서울시청 앞에서 “무력시위는 또 다른 무력시위를, 전쟁 연습은 또 다른 전쟁 연습을, 군비 경쟁의 악순환과 안보 딜레마를 불러온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군대의 도심 시가행진은 사회주의나 전체주의, 개발도상국이나 하는 병정놀이라고 깎아내린다. 과연 그럴까.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를 찾아봤다. ‘Military Parade(군대 행진)’란 표제어에서 52개국이 주기적으로 시가행진을 진행하고 있다고 나왔다.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리 많이 안 보였기 때문에 실제 시가행진하는 나라가 52개보단 더 있을 것이란 추정이다. 제멋대로 민주주의를 국가로 분류하지 않으려고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를 빌렸다. 이 지수는 매년 167개국을 조사해 만들어진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2022년 기준 세계 23위다.
군대의 도심 행진 국가는 민주주의에서부터 권위주의, 공산주의 등 정치체제가 다양했다. 폴란드(공동 46위, 이하 지난해 민주주의 지수)는 8월 15일 폴란드 국군의날이면 수도 바르샤바에서 시가행진을 벌인다. 올해에는 한국이 수출한 K2 전차, K9 자주포, FA-50 전투기가 등장했다. 인도(공동 46위)는 제헌절과 건국절을 겸하는 매년 1월 26일 공화국의 날에 시가행진을 크게 치른다. 초청 외국 정상 앞에서 핵무기까지 자랑한다.
한국산 자주포 앞세운 핀란드군
이들 나라가 민주주의 역사가 짧거나(폴란드),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한다(인도)고 치자. 그렇다면 대표적인 민주주의 진영인 서유럽을 보자. 프랑스(22위) 파리의 바스티유 데이(프랑스 혁명기념일, 7월 14일) 시가행진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벨기에(36위)도 매년 7월 21일 독립기념일에 수도 브뤼셀에서 전투기와 전차를 동원해 시가행진을 한다.
진보적 인사들이 자주 모델로 삼는 북유럽은 어떤가. 핀란드(5위)와 스웨덴(4위)은 매년 6월 4일 국기게양일과 6월 6일 국경일엔 각각 수도 헬싱키와 스톡홀름에서 퍼레이드를 펼친다. 핀란드에선 2017년부터 한국의 K9 자주포가 등장했다. 스웨덴 육군은 창군 500주년을 맞은 지난 5월 24일엔 스톡홀름에서 무기 시연까지 진행했다.
영국(18위)과 네덜란드(9위)는 전차·장갑차 없이 도보 행진만을 진행한다. 미국(30위)에선 독립기념일(7월 4일) 등 주요 기념일이면 현역 장병과 참전 용사, 학군단 등의 도보 행진을 볼 수 있는 지역이 꽤 많다. 일본(16위) 자위대는 정식 군대가 아니지만, 11월 1일 자위대기념일 관열식에 국민을 초청한다.
이처럼 시가행진은 군국주의나 독재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의 시가행진은 북한·중국과 같은 공산주의나 러시아 등 권위주의의 열병식과 본질에서 다르다. 민주주의의 군은 국민의 군이기 때문이다. 당(공산주의)이나 독재자(권위주의)에게 충성하는 군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시가행진은 한마디로 군이 진정한 통수권자인 국민의 사열을 받으며 충성을 다짐하는 자리다. 국민은 군의 준비태세를 살펴본 뒤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군에게 신뢰와 지지를 보내는 행사이기도 하다. 지난 3월 국방부와 한국국방연구원의 설문조사에서 군 장병의 88%가, 일반 시민의 72%가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찬성한 이유다. 실제로 지난달 26일 시가행진 때 교통 통제 때문에 불만이 불거졌지만, 많은 시민이 우산을 쓰거나 우비를 입은 채 늠름한 군 장병에게 박수를 보냈다.
북한에 대한 강력한 경고
시가행진은 대외적 의미도 갖는다. 첨단 무기를 내보이며 안보가 위협을 받는다면 이를 사용한다는 뜻을 알린다. 특히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에서 중요하다. 북한은 지난달 26~27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무력 고도화’를 헌법에 명시했다. 당장 힘으로 평화를 지키는 게 시급해졌다.
허재영 연세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는 “공격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상대가 주저하게 되는데 이것은 억제(Deterrence)의 작동원리”라며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이 핵을 사용하면 북한 정권의 종말’이라고 강조한 게 이런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국민을 안심시키고, 위협도 억제하는 시가행진을 멈춰 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스무니다’ 얼핏 들리긴 했다” 朴이 밝힌 ‘아베 무시’의 진실 [박근혜 회고록 2] | 중앙일
- 취미로 은메달 딴 '양궁 동호인' 주재훈 "또 국대? 잘릴 지도" | 중앙일보
- 남경필 장남 "아빠, 내 마약 때문에 선거 졌죠?" 묻자 그의 대답 | 중앙일보
- '가을의 전설' 58세 여배우 "28년전 성폭력 당했다"…소송 제기 | 중앙일보
- "가족 없을때" 중학생 친딸 성폭행한 40대, 10년 전부터 몹쓸 짓 | 중앙일보
- "방광암 치료하러 오지마라" 담배 냄새 맡은 명의 일침 | 중앙일보
- 공효진, 63억에 산 '저층 건물' 160억에 내놨다…"100억 차익" | 중앙일보
- 금지됐던 시카고 뚫었다…2조짜리 첫 카지노 차린 40대 한인 | 중앙일보
- 막장 교회…목사는 성매매 흥정, 전도사는 녹취 빼내 폭로 협박 | 중앙일보
- 1.7억→160만원 떨어져도 안 산다…화곡동 이 빌라의 비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