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가 된 독립 영웅, 왜 하필 김일성에 반했나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로버트 가브리엘 무가베(Robert Gabriel Mugabe, 1924-2019)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제2대 대통령이자, 한때 세계 근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은 장수 독재자의 대명사로 꼽힌 인물이다.
젊은 날의 무가베는 식민통치에 저항하며 무장 독립운동을 주도해 짐바브웨를 백인들로부터 해방시킨 위대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정작 권력을 잡은 후에는 잔혹한 인권탄압과 학살, 부패와 사치, 경제정책 실패로 인한 초인플레이션 등으로 한 국가를 파탄낸 독재자로 타락했다. 그리고 지도자로 그가 롤모델로 삼은 인물이 놀랍게도 김일성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0월 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19회에서는 '북한을 롤모델 삼은 최악의 독재자 무가베' 편을 통하여, 권력을 향한 욕망에 취해 영웅에서 괴물로 전락해버린 무가베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황규득 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짐바브웨(Republic of Zimbabwe)는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내륙국이며 잠비아, 모잠비크, 보츠와나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짐바브웨는 과거부터 광활한 곡창지대와 풍부한 광물자원을 갖춰 '아프리카의 보석이자 식량창고'로 불릴 만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12~16세기 짐바브웨 왕국 시절에는 경제와 무역이 크게 번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19세기 들어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대륙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오랫동안 고난의 시절을 보내야 했다. 짐바브웨를 차지한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사업가 세실 로즈(1853-1902)는 '대영제국 남아프리카 회사(BSAC)'를 설립하고 아프리카 중남부 지역의 식민지화와 경제적 착취에 앞장선 대표적인 제국주의자였다.
1895년, 로즈는 남아프리카 회사가 병합한 지역을 자신의 이름을 딴 로디지아(로즈의 땅)로 명명한다. 지금의 잠비아 일대가 북로디지아, 짐바브웨는 남로디지아로 분류됐다. 1923년 남로디지아는 자치권을 가진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4년에 식민지 땅에서 로버트 무가베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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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무가베는 훗날의 이미지와는 달리, 젊은 시절에는 놀랍게도 조용하고 성실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18세이던 1942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아프리카 여러 국가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당시 교육 수준이 낮았던 아프리카에서 교사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고 엘리트로 분류되는 지식인이었다.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에 독립의 물결이 불어온다. 북로디지아로 불리우던 잠비아 역시 독립에 성공한다. 그러나 남로디지아는 로디지아로 이름만 변경되었을뿐 여전히 독립과 거리가 멀었다.
영국계이자 로디지아의 첫 현지 태생 백인 총리였던 이언 스미스와 그가 이끄는 로디지아 전선 정당은 "로디지아를 만든 것은 백인이고, 주인인 백인이 계속 이곳을 지배해야 한다"며 백인우월주의를 주장했다. 1960년대 당시 로디지아는 전체 인구의 약 6.5%에 불과한 소수의 백인들에게 부와 권력이 집중된 상태였고 흑인은 참정권도 보장되지 않았다. 스미스는 흑인 정부가 세워지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논리로 독립을 강하게 반대했다.
1960년, 36세의 무가베는 귀국했다가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목격한 뒤 교사 일을 그만두고 정치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국민민주당에 입당하며 로디지아의 독립투쟁을 시작했다.
1962년 무가베는 한 인터뷰에서 '다인종주의'와 흑인의 참정권을 주장하며 "모든 사람은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이것이 우리가 흑인들의 투표권을 주장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당시 영상에서 젊은 무가베는 엘리트 출신답게 억양과 어휘까지 세련된 고급 영어를 구사했으며, 훗날의 독재자 이미지를 상상하기 어려울만큼 합리적이고 품격있는 화술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무가베는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날리며 1963년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동맹(ZANU) 정당의 사무총장까지 맡게 된다. 이안 스미스 정권은 로디지아에서 흑인들의 정당 활동을 전면 금지했고 반대파를 반정부세력으로 몰아 철저하게 탄압했다. 1964년 무가베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가베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무가베는 감옥에서 공부를 계속하면서 런던대학교 경제학과 법학 석-학사 학위를 잇달아 취득했다. 가나 출신의 아내 샐리는 런던도서관에서 무가베에게 필요한 자료를 필사하여 감옥으로 전달했고, 무가베는 아내의 헌신적인 내조에 힘입어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무가베는 한때 '아프리카에서 가장 지적인 지도자'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무가베가 감옥에 있던 1965년, 이언 스미스 정권은 본국인 영국 정부로부터 일방적인 독립을 선언한다. 당시 영국은 흑인 지배하의 독립을 제안했지만 스미스는 끝까지 소수 백인 지배하의 독립을 고수했고 1970년에는 로디지아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이에 맞서 흑인 세력들의 독립투쟁도 더욱 치열해지며 무장 게릴라들의 연이은 봉기와 테러로 이어졌다.
1974년 11월, 50살의 나이로 출소한 무가베 역시, 자신이 이끌던 ZANU와 함께 같은 목표를 지닌 흑인 세력들과도 함께 연대하여 무장 투쟁에 동참한다. 스미스 정권은 게릴라군을 잔혹하게 진압했지만 그럼에도 독립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장기화된 내전과 국제사회의 압박에 시달리던 스미스 정권은 결국 백기를 들고만다.
1979년 12월 21일 영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랭커스터 협정'에서 정부와 반군 측은, 영국 감시하의 총선거와 기존의 백인소유 농지를 인정한다는 조건에 합의한다. 이어 1980년 2월에는 새로운 정부를 선출하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됐다. 협정에도 대표로 참석했던 무가베(ZANU), 조슈아 은코모(ZAPU), 무조레와(UANC), 이안 스미스(로디지아 전선)의 4파전에서 무가베가 이끄는 ZANU가 총선에 승리하며 제 1당이 되었다.
총리로 당선된 56세의 무가베는 "이것은 매우 위대한 순간이다. 우리의 승리는 국가적 투쟁의 절정"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해 4월에는 영국 왕세자 찰스(현 국왕 찰스 3세)가 영국 대표로서 독립을 공식 승인하면서 로디지아는 사라지고 독립국가 '짐바브웨'의 역사가 시작된다.
무가베 정권의 출범으로 짐바브웨의 백인들은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무가베는 의외로 "우리는 그들(백인들)이 이 나라에서 살기를 원한다. 어떤 제한도, 어떤 피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역으로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 백인들이 더 큰 안정감과 자신감, 소속감을 갖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것이 그들에게 전하는 우리의 메시지"라고 선언하며 온건한 '흑백화합' 정책을 강조했다.
무가베는 기존의 극우 백인정당인 로디지아 전선을 인정했고 다수의 흑인 정당과 함께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무가베는 교육기회 확대, 의료 개혁 등 적극적인 민생정책을 펼치며 민심을 얻었다. 국제사회에서도 이러한 무가베를 호평하는 반응이 점점 높아졌고 이제 그는 짐바브웨의 독립투사를 넘어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뛰어난 지도자'로 명성이 높아지기에 이른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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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누가봐도 지적이고 현명한 지도자였던 무가베가 훗날 독재자로 갑자기 '흑화'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북한 김일성과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당시 무가베 정권은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교류했으며 1980년 10월에는 북한과도 공식 수교관계를 맺는다. 총리가 된 무가베도 김일성의 초청을 받아 북한을 방문했다.
여기서 무가베는 지도자를 숭배하는 북한 사람들을 보고 김일성의 절대권력 유지방식과 일당 독재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당시 짐바브웨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무가베는 북한에 다녀온 이후, 거의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집단체조를 하는 사람들도 가득찬 경기장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김일성처럼 되고 싶다'며 돌아왔다"고 한다.
미국 언론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무가베는 주체사상이 담긴 <김일성 선집> 영문판을 읽기 시작했고 각료들에게도 김일성의 연설문을 읽도록 권했다고 한다. 또한 무가베는 북한의 매스게임, 카드섹션 등에 감명 받아 짐바브웨 국민들에게도 이를 따라하게 하고, 자신의 생일날마다 하루종일 찬양을 하는 우상화 작업을 강요했다. 그는 짐바브웨를 북한처럼 독재국가로 만들어서 오직 자신만이 지배하는 국가로 만들겠다는 잘못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무가베 정권은 독재 체제 확립을 위하여 가장 먼저 한때의 동지이자 정적인 은코모와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은데벨레족을 제거했다. 무가베는 짐바브웨 독립운동 당시 쓰이고 남은 무기들을 쿠데타의 증거로 조작하며 잔혹한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았다.
무가베는 학살작전만을 위한 특수부대인 '제 5여단'을 창설했는데 이들은 전원 무가베의 핵심 지지세력은 쇼나 족 출신이었고, 북한 특수부대 교관들을 초빙하여 훈련까지 받았다. 이들은 태권도를 구사하고 북한식 보법으로 걸어다녔다고 한다.
제5여단은 은데벨레족 거점 지역을 급습하여 가는 곳마다 반 무가베세력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무가베군은 은데벨레족 남성들을 보는 즉시 구금하거나 처형했고,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애거나 산 채로 화형시키는 잔혹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임산부의 아기를 강제로 꺼내 불태워 죽인 뒤 부모에게 그 시신을 강제로 먹으라고 강요했다는 충격적인 일화도 존재한다.
1983년부터 2년여간 지속된 이 '구쿠라쿤디 학살사건'으로 인하여 약 2만여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현지에서는 지금도 무가베 정권과 결탁하여 잔혹한 폭력과 전쟁범죄를 수출한 북한에 대한 짐바브웨인들의 인식도 대단히 나쁘다고.
은코모는 런던으로 도피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진 뒤 무가베와 단일화 협약을 체결한다. 두 사람이 이끌던 정당이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애국전선(ZAUN-PF당)'이라는 하나의 당으로 합쳐지면서 짐바브웨 의회 100석중 79석을 장악한 압도적 다수당을 장악하게 된 무가베는 총리직까지 폐지하고 1987년 12월 31일 63세의 나이에 마침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무가베가 대통령이 된 이후 짐바브웨의 경제는 급격히 악화된다. 무가베의 핵심 지지세력이었던 3만 6000여 명의 퇴역군인들에게 과도한 무상지원으로 재정위기가 심화되었고, 1990년대 초반에는 연이은 가뭄과 기근으로 식량위기까지 겹쳤다.
결국 1990년 짐바브웨는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경제구조조정 프로그램이 시행된다. 이로 인하여 국영기업의 민영화로 인한 대규모 실업자 발생, 보조금 지급 철폐로 인한 사회 복지 후퇴로 질병확산 및 식량안보 위기, 무역 및 통화 규제 완화로 산업 경쟁력 악화 등의 악순환이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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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상가상 국가 경제가 악화되던 상황에서 무가베는 타국의 전쟁인 2차 콩고내전(1998-2003)에 참전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무가베의 의도는 콩고 정부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광물자원을 받아 수익을 내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전쟁의 수익은 대부분 무가베와 측근들에게만 돌아갔고,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의 부담은 고스란히 짐바브웨 국민들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무가베는 핵심 지지기반이던 퇴역군인들의 반발과 민심 악화로 장기집권이 흔들릴 위기에 처하자, 이번에는 토지 재분배 정책을 내세워 2001년 11월, 백인들이 소유한 토지의 무상몰수를 허용하는 대통령령을 발표한다. 그 선봉에 선 퇴역군인들과 제5여단은 백인들의 농장에 침입하여 농장주들을 강제로 내쫓고 방화-폭력 등을 일삼았다. 공격의 표적이 된 수많은 백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삶의 터전을 잃고 해외로 도피해야 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짐바브웨 경제의 핵심축이던 백인들의 농장을 일방적으로 몰수한 것은 더 큰 후폭풍을 불러왔다. 각종 농산물과 생계형 작물들의 생산이 급감하면서 짐바브웨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고 졸지에 식량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백인 농장에 일하던 약 40만 명의 흑인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으면서 그 가족까지 포함하여 국가 실업률이 50%까지 폭증했다. 백인 토지 몰수정책에 반발한 서구권의 경제적 지원도 끊기고 말았다.
여기에 짐바브웨의 파멸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화폐 개혁'이었다. 경제학위를 수료했다는 전력이 의심스럽게도 무가베는 치솟는 물가를 따라가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화폐 표기단위에서 0를 모두 삭제하고 새 지폐를 마구잡이로 발행한다는 어이없는 정책을 내놓았다. 당연하게도 화폐 가치는 더욱 폭락했고, 100조 달러 단위의 지폐도 등장했다. 초인플레이션이 정점에 이른 2008년에 이르면 짐바브웨의 경제는 10의 22제곱에 이르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을 기록할 만큼 완전히 무너졌다.
궁지에 몰린 짐바브웨 정부는 2009년 결국 외국 화폐 사용을 공식 허가한다. 당시 짐바브웨에서는 이미 미국 달러 사용이 선호되고 있었고, 2015년에 이르면 결국 정부가 짐바브웨 달러 폐기를 선언한다. 화폐 폐기 당시 짐바브웨 달러로 17경 5000조 달러의 가치는 미국 화폐로 단돈 5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무가베 정권 하에서 국가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철저히 무너지면서 짐바브웨는 아프리카의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90년대 60대였던 짐바브웨인의 기대수명은 2006년 기준 30대로 추락했다. 유엔(UN)은 "짐바브웨 인구의 절반이 기아에 직면해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진 무가베는 2009년 3월,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수단을 30년간 지배한 오마르 알 바시르나 북한 김정일 등을 제치고 '세계 최악의 독재자 1위'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무가베의 여러 가지 실정 중에서도 1위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나라 경제를 파탄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최악의 평판 속에서도 무가베가 장기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철저한 철권통치였다. 무가베는 합동작전사령부(JOC)와 국립청소년서비스(NYS)라는 이름의 친위조직들을 만들어 국가안보를 핑계로 정권유지를 위한 선거조작 및 민간인 테러-폭력 행위 등을 자행했고, 어린 청소년들까지도 자신의 수족으로 이용했다. 또한 무가베는 2008년 대선에서는 유력한 야당 후보였던 모건 창기라이와 그 지지세력을 탄압하여 결선투표를 포기하게 만들고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84세의 나이에 재집권에 성공한다.
무가베는 현모양처였던 첫 번째 아내 샐리가 사망한 이후, 1996년 비서였던 41세 연하의 그레이스와 재혼에 성공했다. 국가가 파탄난 상황에서도 무가베 일가의 '사치'는 극심했는데, 여러 채의 초호화주택을 지어 자신의 별장들로 애용했고, 생일 때마다 자신의 나이와 똑같은 무게의 케이크를 특별주문하는가하면 생일파티 한 번을 위하여 17억이 넘는 돈을 들였다고 한다. 지난 2014년, 무가베가 자신의 90세 호화 생일파티를 기념한 소감에서 "9살 소년같은 젊음을 느낀다. 나는 90살에서 0을 떼버렸다"고 즐거워하던 모습을 통하여, 국민들이나 국제사회와 철저히 괴리된 그의 현실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정권의 실질적 2인자였던 아내 그레이스는, 항상 값비싼 명품을 즐겼고 런던에서 한 고급 백화점의 셔터를 내리고 혼자만의 쇼핑을 즐기는가 하면, 파리에서는 1시간 쇼핑에 1억 원 이상의 돈을 썼다는 일화도 전한다. 또한 그레이스는 사치뿐만 아니라 안하무인에 폭력적인 성격으로도 악명이 높아 여러번 폭행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던 무가베 일가의 권력도 최후의 순간은 찾아왔다. 무가베는 아내 그레이스에게 권력을 이양하기 위하여 자신의 측근이자 독립투쟁을 한 전우였던 에미슨 음낭가과의 축출을 시도하다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2017년 11월, 음낭가과를 지지한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여 무가베 일가가 축출되면서 무려 37년간의 기나긴 철권통치도 막을 내렸다. 무가베의 사임소식에 짐바브웨 국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나와 환호했다.
다만 무가베의 퇴진이 곧 인과응보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짐바브웨 정부는 무가베의 안전을 보장해주기로 했고, 무가베 일가는 사임 이후에도 막대한 연금을 받으며 계속 호화생활을 누렸다. 2019년 9월 6일, 95세의 무가베는 건강이 악화되면서 싱가포르의 한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균수명이 반토막난 짐바브웨의 국민들과 달리, 무가베 본인은 끝까지 평온하게 천수를 다 누리고 간 셈이었다.
'독재는 압제를 낳고, 노예를 낳고, 잔혹함을 낳는다. 더 끔찍한 것은, 독재는 어리석음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아르헨티나의 대문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어록이다. 짐바브웨가 독립 이후 오히려 오늘날까지 아프리카의 최빈국으로 전락한 데는 무가베가 남긴 악영향이 너무나 컸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다.
한때는 독립운동가였으나 결국 자신의 욕망과 장기집권에만 눈이 멀어 국민과 정적에게 총구를 겨눈 독재자로 타락하면서 국가 전체가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미치는 영향력이 한 나라의 운명과 역사까지 어떻게 좌우할 수 있는지 그 무게감을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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