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민주주의 위기와 정치 실종

2023. 10. 4.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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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한 시민혁명은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아 사회나 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만들었다. 시민은 선거를 통해 사회를 다스릴 권한을 통치자에게 위임하고 통치자는 견제와 균형의 국가 시스템 안에서 민주적 통치를 하게 된다.

이런 민주주의 사회 질서가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다. 삼권분립과 대통령제를 탄생시킨 미국에서조차 선거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난입 사태까지 벌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극단주의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입법·행정·사법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상호존중의 민주주의 질서가 도전을 받고 있다.

「 극단주의 득세 민주주의 흔들어
상대편 탓만 하는 정치권 무능
정부 역할은 미래 위한 정책설계
화합의 예술 보여주는 정치 절실

민주주의의 기본 질서를 지켜야 할 정당에서조차 유리하지 않은 사법부 판결이 나오면 강한 비난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졌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져야 하는 행정과 입법 사이에도 질서는 무너지고 있다. 장관과 국회의원의 입씨름이 도를 지나쳐 정책토론이 아니라 감정적 상호비방으로 일관한다. 미국도 대통령이 의회에서 연설하고 나자 하원의장이 그 자리에서 연설문을 찢어버릴 정도로 심각한 갈등 양상을 보인다.

정치는 서로 다름을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지혜를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지혜를 갖춘 정치와 정치가는 실종되고 있다. 정치적 갈등의 심화는 극단적 강경파의 활약을 부추기게 된다. 최근 바이든 행정부의 예산안을 강경파 공화당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서서 연방정부 셧다운을 몇 시간 남겨 놓고 임시 예산안이 간신히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이런 합의를 끌어낸 자기 당 하원의장에 대해 불신임안을 상정한다고 한다. 20여명에 불과한 친트럼프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공화당 하원의원 221석을 좌지우지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 민주주의문화재단(Democracy and Culture Foundation)과 뉴욕타임스 주최로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아테네 민주주의 포럼’에 참석했다. 전 세계 지성인들이 모여 민주주의의 위기와 해법을 고민하는 자리였다. 최근 독재적 지도자들의 권력이 확장되고, 인공지능이 인간 노력의 가치를 침해하고, 빈부격차는 심화하고, 기후변화는 더욱 심각해지고, 표현의 자유는 공격을 받고, 유럽에서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포럼에서는 21세기가 직면한 민주주의 위기의 극명한 현실로 보았다. 지난 20세기 후반 누려왔던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있는 오늘 과연 인류의 미래에 희망이 있는가를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포럼에서는 민주주의 위기가 발생한 원인은 급격한 사회변화에 있다고 분석했다. 디지털 혁명으로 사회가 빠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해 위협을 느끼게 된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이에 따라 돈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정부의 힘도 커지지만, 시민의 영향력은 점점 감소한다고 느껴서 불안감이 커진다고 한다. 불안감과 무력감은 모든 문제를 자신이 아니라 사회의 탓으로 돌리게 한다. 이것이 정치 선동과 연결될 때 극단적인 행동이 나타난다.

개인의 사회적 불신뿐 아니라 정치권도 상대에 대한 불신으로 사회문제를 풀려고 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사회문제를 미래지향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상대편의 과거 잘못에 대한 비난이 우선이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이나 윤석열 정부의 카르텔 철폐를 보면 모두 상대편을 탓하는 닮은꼴이다. 정부의 역할은 남의 탓보다는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책설계를 하는 일이 우선이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프리츠 하이더(Fritz Heider)는 일찍이 이런 현상을 귀인이론(attribution theory)으로 분석했다. 인간은 종종 문제의 본질보다는 이를 외부적 상황이나 개인적 특질의 탓으로 돌려 해석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도 상대편 집권세력의 과거를 청산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서로 주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 불신을 가중하는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정치선동가들이 사회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사회 불신과 개인의 불안감이 언론의 편향보도와 개인 미디어의 발달, 그리고 정치 선동으로 인해 극단주의 세력의 역량을 더욱 키워주고 있다. 극단주의 세력의 득세는 기존 정당의 정치질서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쉽게 무너뜨린다. 극단적 팬덤 현상은 헌법기관이라고 하는 국회의원의 소신을 쉽게 마녀사냥감으로 만들고 정당의 기본 이념이나 가치보다 집단의 이익을 앞세우게 한다.

우리 인류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아 세계대전을 일으켜 몰락한 역사를 잘 기억하고 있다. 극단적 세력이 득세할 때 합리적 사고는 길을 잃는다. 정치는 치열하게 대립하더라도 결국은 화합을 끌어내는 예술이다. 정치권에서 내로남불이 일상화되어가는 오늘 김수환 추기경이 남기신 “내 탓이오”라는 말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온다.

염재호 태재대학교 총장·전 고려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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