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미국, 한국을 일본·호주 수준으로 대우해야
2003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에 축하 사절로 방한한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은 사석에서 한국이 이룬 업적을 높게 평가했다. 필자는 축하받을 사람이 더 있다면 안보의 일역을 담당해온 주한 미군 병사들이라고 화답했다.
1953년 7월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이후 지난 70년 동안 한·미 동맹이 없었더라면 산업화와 민주화의 길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안보의 문제만은 아니다. 항상 전쟁에만 대비하는 나라는 경제적 부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군사주의로 흐르기 쉽다. 한·미 동맹은 이런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상대적 여유 속에서 한국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방면에서 빠른 발전을 추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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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번영 이룬 한·미동맹 70년
미국 안보 공약에도 불신 잠재
한국은 이제 ‘변경지역’ 아니야
」
필자가 당시 파월 장관에게 몇 마디 보탰다. “한국의 발전은 세계사적 영향을 끼쳤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은 옛 공산권에 깊은 충격을 줬다. 세계 전역에서 공산정권들이 급격하게 무너지거나 재편됐다. 이것은 옛 공산권의 고위 공직자나 영향력 있는 학자 또는 일반인을 만나서 확인한 것이다. 특히 미하일 고르바초프 측근 브레인들의 이야기가 그랬다. ‘서울올림픽 이후에는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용기가 생겼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과거가 모두 행복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1950년 3월 한국 정부는 세 명의 국회의원을 미국에 파견했다. 국회의장 신익희와 의원 2명(라용균·이훈구)이 함께 가고 사무총장 이종선이 수행했다. 당시 미국에 이런 사절단을 파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출발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나라의 사정이 매우 어렵다. 북한은 전쟁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데 우리는 병력과 장비 훈련 등 모든 것이 미흡한 형편이다. 미국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우리의 군비를 도와주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달라.”
실제로 그 전해 ‘애치슨 선언’에 따라 미군이 철수한 이후부터 한반도의 안보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특히 주한 미 군사 고문단과 존 무초(1900~1989) 대사의 안일하고 때로는 경망한 태도에 깊은 실망과 우려가 팽배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을 방문한 의원들은 애치슨 국무장관을 비롯해 정·관계 인사들을 만나 한반도 실정을 설명하고 군비 지원을 요청했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 통일을 외치는 것은 국민의 사기를 고려한 때문이지 현실적으로 중·소가 배후에 있는 북한을 공격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지만, 미국 측은 관심이 없었다. 실망을 안고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초기에 훈련과 장비 등 여러 면에서 잘 준비된 공산군에 맞서야 했던 국군과 미군은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것은 정치인들의 잘못된 판단이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자 동시에 앞날에 대한 경고도 될 것이다.
그 후 지난 70년에 걸친 안보 성공에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흔히 ‘안보 불감증’이라 부르는 현상은 역설적으로 안보 성공의 부정적인 결과다. 특히 최근 국내에서 대북 문제를 중심으로 안보에 관한 심각한 이견이 있다. 이견 자체는 순기능적일 수도 있지만, 이념적으로 거의 양분돼 합리적인 토론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를 낳을 정도다.
되풀이되는 약속에도 미국의 안보 공약에 대한 불신이나 회의도 남아 있다. 예컨대 “미국의 안보 공약은 정권이 바뀌면 지켜지지 않는 일이 많다” “미국은 호주에 핵추진잠수함을 공급하기로 했지만 사정이 더 어려운 한국에는 허용하지 않는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 핵물질 농축 등 핵 문제 관련 일본과 같은 수준의 합의를 해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신의 목소리가 다양하게 제기된다.
한·미 양국 정부의 공식적 언질과는 달리 이런 생각은 많은 안보 전문가와 일반인이 공유하고 있다. 결국 미국이 한국을 다른 우방과 같은 수준으로 대우해 주는가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한·미 정상회담과 한·미·일 정상 합의까지 나온 이후 상황에서 시급한 문제는 한·미 동맹이 미국과 일본, 미국과 호주 관계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한국이 이미 자유 세계의 변경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라종일 동국대 석좌 교수, 전 주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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