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코코 샤넬’ 노라노, K패션의 시작
윤복희·펄시스터즈 내세워 미니스커트·판탈롱 유행시켜
[쿠키칼럼-이희용]
뉴욕·파리·밀라노·런던에서 봄가을로 열리는 패션위크는 세계 4대 패션쇼로 꼽힌다. 올해로 각각 80주년, 65주년, 50주년, 40주년을 맞는 이들 행사에서 한국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2012년 뒤늦게 출발한 서울 패션위크도 해마다 ‘폭풍성장’을 거듭하며 도쿄·홍콩 등을 제치고 세계 5대 패션쇼 진입을 꿈꾼다.
디올·구찌·루이비통 등 유명 브랜드들도 앞다퉈 서울에서 패션쇼를 열고, 우영미·서혜인 등은 자신의 이름을 딴 브랜드로 전통의 명품들과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이른바 K패션도 한류 물결에 가세한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패션 디자이너의 선구자는 누구일까?
이듬해 국제패션디자인학원(국제복장학원)의 전신인 함흥양재전문학원을 세웠다. 앙드레김·진태옥·이상봉·이신우 등이 그의 제자다.
최경자보다 17년 뒤에 태어났지만 구미 유학파 디자이너 1호, 국내 최초의 패션쇼 개최, 디자이너 기성복 출시의 원조, 한국 브랜드 최초로 미국 백화점 입점 등 이름 앞에 숱한 ‘최초’ 타이틀을 단 디자이너가 있다. ‘한국의 코코 샤넬’ 노라노다.
노라노는 경기여고를 다니다가 근로정신대 징용을 피해 1944년 일본 육사 출신의 일본군 장교 신응균(국방부 차관 등을 역임하고 1996년 사망)과 결혼했으나 2년 만에 이혼했다.
미군정청에 취직하면서 본명 노명자 대신 ‘노라 노(Nora Noh)’란 영어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주인공(노라)처럼 자유인으로 살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식산은행장 스미스의 비서로 일하며 주말마다 안국동 관사에서 열리는 파티 준비와 통역을 맡았다. 한미 고관들과 각국 대사 등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노라노는 드레스를 살 돈이 없어 한복이나 기모노 천으로 직접 만들어 입었다.
그의 솜씨를 보고 한 미국인이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를 권했다. 노라노는 그때까지 그런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진로를 결정하고
1947년 팬아메리칸항공이 한미간 상용 여객기 운항을 시작했는데, 한국인 여성 탑승자는 성악가 김자경에 이어 노라노가 두 번째였다.
LA의 프랭크 왜건 기술전문학교에서 바느질에서부터 다림질까지 모든 과정을 배우고 익힌 뒤 2년 만에 귀국했다.
신당동 집 2층에 의상실을 차리자 미군 장교와 외국 대사 부인들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세련된 감각과 실용적인 스타일에 매료된 것이다.
서울발레단 단원인 둘째 여동생 덕자의 발레복을 지어주다 보니 주변에 소문이 나 연극과 쇼 무대 의상도 만들게 됐다. 연극 ‘햄릿’의 김동원과 오페라 ‘나비부인’의 김자경 등이 노라노의 옷을 입고 관객의 갈채를 받았다.
‘노라노의 집’은 종로 네거리와 퇴계로를 거쳐 명동으로 진출했다. 전국에 노라노양재학원, 노라노의상실, 노라노예식장 등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그의 인기와 지명도가 높다 보니 무단으로 이름을 도용한 것이다.
그해 11월 29일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모든 의상을 우리 옷감으로 만들어 더욱 뜻깊었다.
영화 의상도 그의 독무대였다. 엄앵란·김지미·최은희·문희 등 톱스타들이 단골이었다. 미스코리아 샤프롱(후견인)도 담당했다. 1959년에는 오현주를 앞세워 미국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대회에서 의상상을 차지했다.
1967년 가수 윤복희에게 미니스커트를 입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이듬해 펄시스터즈로 하여금 판탈롱(나팔바지)을 유행시킨 주인공도 노라노였다.
1960년대 들어 TV가 영화의 인기를 앞지르자 드라마 의상 협찬에 나섰다. 하루 만에 빌려준 옷을 회수할 수 있으니 훨씬 경제적이고 효과도 높았다. 태현실·강부자·여운계·사미자·윤여정 등이 노라노 옷을 입고 브라운관에 등장하면 눈 밝은 시청자들은 이튿날 그 옷을 사려고 매장을 찾았다.
노라노는 그동안 맞춤복으로 축적한 고객들의 평균 신체 사이즈를 바탕으로 1963년 최초로 디자이너 기성복 브랜드를 론칭했다. 일반인도 저렴한 가격에 멋진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려는 시도였다.
1966년 미우만백화점(미도파백화점에 합병)에 기성복 코너를 열고 기성복 패션쇼도 열었다. 캐치 프레이즈는 ‘마음대로 입어보고 골라 입는 옷“이었다.
노라노는 해외 진출에서도 단연 선두 주자였다. 1965년 미국 하와이에서 패션쇼를 열어 브랜드 수출을 시작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파리 패션위크 프레타포르테(기성복)에 참가했다.
2000년 세계패션그룹 한국협회 패션대상과 2011년 제1회 한국패션 100년 어워즈 디자이너 부문을 수상하고, 2015년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는 지금도 일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 1991년 청담동에 새롭게 둥지를 튼 노라노빌딩 작업실에서 스케치하고 패턴을 만든다.
노라노는 패션쇼 런웨이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려고 했다. 샤넬이 코르셋에서 유럽 여성을 해방시켰듯이, 한국 여성들도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발히 활동하기를 바랐다.
2013년 10월 3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노라노’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옷을 통해 여성 몸의 움직임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자존심을 갖게끔 노력했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hoprave@gmail.com
Copyright © 쿠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봉천동 아파트 방화 용의자 유서 남기고 사망…“엄마 미안하다” [쿠키포토]
- 믿을 것은 K-방산 뿐…업계 빅4, 통상 먹구름에도 ‘관세 무풍지대’
-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결책은? 이재명, 주식시장 정상화 로드맵 제시
- [단독] 현대차 스타리아 디젤 생산 중단…“품귀 현상 가속화”
- 24일 한미 ‘2+2 통상담판’…트럼프 등판 가능성도
- 교육부, 의대생 만난다…“이달까지 복귀 기다릴 것”
- 넷플릭스 손잡은 ‘약한영웅2’, 웨이팅 맛집에서 캐릭터·관계성·액션 맛집으로 [쿠키 현장]
-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에 김형두 재판관 선출
- 민주당, ‘관세 협상’ 앞둔 한덕수에 “대행이 협상 전면에? 바람직 않아”
- ‘토허제 해제’ 후폭풍…가계빚, 보름 만에 2.5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