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행만 바랐다" 위기 자초한 한국의 올드한 농구
[이준목 기자]
"3개월 동안 지켜봤다. 선수들이 단단하게 마음 먹고 아시안게임인 만큼 결과를 떠나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든 걸 걸어야 했다. 그런 부분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기는 게 요행을 바라는 것 같아서 거기에 정말 화가 났다."
한일전 패배 이후 국가대표 가드 허훈이 남긴 작심발언이었다.
추일승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남자농구 대표팀은 9월 30일 중국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에서 열린 일본과의 항저우아시안게임 조별리그 D조 최종전에서 77대83으로 패했다. 한국은 앞서 인도네시아(95대55)-카타르(76대64)를 제압하며 2연승했으나 이날 패배로 2승1패를 기록하며 D조 2위가 됐다.
한국농구는 2014년 인천 대회 이후 9년 만의 정상 탈환을 노렸다. 하지만 이 한번의 패배로 입은 충격이 매우 크다. 일단 상징성이 큰 한일전 패배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한국은 그동안 구기종목에서 야구-축구 등과 달리 농구만은 꾸준히 우위를 자부해왔다.
최정예 아닌데도 패배
더구나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선 일본은 최정예가 아닌 2진이었다. 최근 자국에서 치른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에서 아시아 최고성적인 3승을 거뒀던 일본은 당시 멤버가 1명도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은 평균연령 24.9세의 젊은 선수들 위주로 이번 대회에 나섰다. 지휘봉도 농구월드컵을 이끈 톰 호바스 감독 대신 국가대표 코치인 코리 레인즈가 이어받아 아시안게임 준비기간이 한달도 채 되지 않았다.
물론 한국도 오세근-송교창-문성곤-여준석-최준용 등 포워드진의 공백이 컸다고 하지만, 귀화선수인 라건아를 비롯하여 허훈-김선형-전성현-이승현 등 주전급과 베테랑 선수들이 대부분 건재한 최정예였다. 손발을 맞춘 기간도 한국은 일본대표팀보다 훨씬 긴 3개월 이상이었다. 목표를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잡은만큼 변명의 여지 없이 무조건 이겼어야만하는 승부였다.
하지만 한국 1진은 일본 2진에게 경기 내내 그야말로 농락당했다. 그것도 어쩌다 당한 이변이 아니라 철저히 실력으로 밀린 결과였다. 내용상 겉보기에는 접전이었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굴욕이었다. 한국은 이날 일본을 상대로 경기 초반부터 0-13으로 밀린 것을 비롯하여 40분 내내 단 한번의 리드도 잡지못했다. 3쿼터 중반에 동점 한번, 4쿼터에 1점차까지 추격한 것이 그나마 최상의 순간이었다.
일본은 이날 3점슛을 무려 17개나 성공시키면서 한국의 수비를 무너뜨렸다. 포지션을 가리지않고 11명 출전 선수 가운데 10명이 고르게 3점슛을 적중시킬 정도로 대부분의 선수들이 외곽슛 능력이 탁월했다. 이마무라 케이타가 최다인 22점을 넣었고 사이토 다쿠미와 아카호 라이타도 각각 10점씩을 기록했다.
한국은 이날 지역방어가 제대로 작동하지않으며 수비가 무너졌고, 우위로 여겨졌던 골밑싸움에서도 우세를 점하지 못했다. 라건아는 12점 9리바운드를 기록했으나 일본의 더블팀에 고전하며 카타르전같은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은 3,4쿼터 추격의 흐름마다 상대에게 무더기 공격 리바운드를 허용하며 일본에게 2,3번째 공격 기회를 내주기 일쑤였다.
이날 경기를 통하여 두드러진 한국과 일본의 농구스타일 차이는 눈여겨볼만하다. 일본은 이날 극단적으로 3점슛 위주의 '양궁농구'를 펼쳤다. 3점슛은 단신팀이 보여줄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중 하나이고, 양궁농구는 과거 우수한 슈터 자원이 많았던 한국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했다.
하지만 올드한 한국식 양궁농구와 현대화된 일본식 양궁농구의 차이점은 세련된 스페이싱(공간 활용)이었다. 일본은 선수 전원의 빠른 트랜지션 게임과 포지션을 가리지 않는 오프더볼 무브, 유기적인 패스워크를 활용하여 경기 내내 끊임없이 외곽슛을 시도할 공간을 만들어냈다. 또한 일본이 성공시킨 3점슛에는 과감히 장거리에서 던지는 '딥쓰리'도 다수였다.
반면 한국은 일단 골밑에 볼을 투입한 뒤 2대2나 하이로우 게임을 통하여 공격을 전개하려는 고전적인 방식에 의존했다. 간결한 패스플레이로 모든 선수들이 고르게 공을 만질 기회가 있었던 일본과 달리, 볼 흐름이 좋지않았던 한국은 두 세번의 패스 뒤에 성급한 슛시도나 드리블에 이은 공격이 많았다. 일본의 빠른 더블팀에 막혀 골밑 공격은 확률이 떨어졌고 외곽은 오픈찬스도 적중률이 떨어졌다. 전성현과 허훈이 각각 4개의 3점슛을 기록했으나 패스로 만들어진 득점보다는 개인능력으로 우겨넣은 터프샷이 많았다.
무엇이 문제인가
일본은 2000년대 이후 대표팀 운영에 꾸준히 투자를 하면서 현대농구의 트렌드를 흡수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선수들이 바뀌어도 시스템과 철학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전임감독이 바뀔때마 선수구성과 바뀌기 일쑤고, 대표팀 운영에 대한 부실한 지원 문제는 수십년째 개선이 되지않고 있다. 한국농구가 일본 2진에게 참패를 당한 것은 절대 우연이나 이변이 아니라, 필연에 가깝다.
여기서 허훈의 '요행 발언'을 곱씹어봐야할 이유는 어쩌면 이번 아시안게임에 나서는 한국농구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한국농구는 그동안 국제대회에서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못했지만 그나마 아시안게임에서만큼은 선전해왔다. 아시아 경쟁국가들이 대부분 최상의 전력을 내보내지 못한 이번 항저우 대회는 한국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막상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한국의 경기력과 농구 스타일은, 과연 우승을 노릴만한 자격이 있는지 회의감이 들게하기 충분했다.
허훈은 아시안게임에 임하는 선수들의 절실함이 떨어진 것 같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선수들만의 탓일까. 국제대회에 나라를 대표하여 나서는 선수들이 최상의 집중력과 동기부여를 보여주지 못했다면, 그럴만한 환경과 시스템을 구축하지못한 한국농구의 문제는 아닐까.
한국은 지난 7월 일본과의 평가전을 통하여 일본농구의 전력을 이미 파악한 바 있다. 물론 선수들은 모두 바뀌었지만 팀이 추구하는 전술과 스타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한국은 3개월 전보다 선수들 개개인의 네임밸류는 더 떨어진 팀에게 알고도 당했다. 어쩌면 진정으로 요행을 바란 것은 올드한 한국농구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더 큰 우려는 한일전 패배가 비극의 끝이 아닐수 있다는 점이다. 8강 직행이 좌절된 한국은 2일 열리는 12강전에서 바레인을 넘어야한다. 중동의 복병 바레인 역시 1년전 열린 FIBA 아시아컵에서 한국과 접전을 벌였을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설사 바레인을 넘는다고 해도 한국은 바로 다음날 우승후보인 홈팀을 중국과 8강에서 만나야한다. 객관적 전력에서 앞선 중국보다 한 경기를 더 치르고, 24시간도 안되어 충분히 회복할 시간도 없이 또 경기를 치러야하는 최악의 일정이다. 어쩌면 우승은 고사하고 5위로 노메달에 그쳤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대회 이후 최악의 참사를 걱정해야하는 한국농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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