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집' 아닌 '잡'을 원한다…은퇴 '거부'한 79%의 항변
지방의 한 공기업에서 33년간 일하고 정년은퇴한 60대 A씨는 쉴 틈도 없이 새 일거리를 찾고 있다. 월 200만원에 못 미치는 노령연금만으로 부부 생계를 꾸려가기 쉽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경력에도 받아주는 곳이 없어 눈을 낮춰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
정년 연령에 도달해 퇴직한 고령층 가운데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비중이 79%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8명은 사실상 은퇴를 거부하는 셈이다. 고용연장 방안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통계청 ‘고령층 부가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정년퇴직으로 가장 오래 근무한 일자리를 그만둔 고령층 44만3000명 가운데 79.0%인 35만명이 “계속 근로하길 희망한다”고 답했다. 이는 전체 고령층의 계속근로 희망 비율(68.5%)보다 10.5%포인트 높은 수치다. ‘정년의 벽’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고령층일수록 계속 일하고 싶은 갈망이 큰 것이다.
정년퇴직 인구는 고령화로 인해 2021년 39만4000명에서 지난해 41만7000명, 올해 44만3000명으로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년을 맞아 은퇴하고도 노동시장에 남아있고 싶은 고령층도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정년퇴직을 하고도 계속 일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일하고 싶어서/일하는 즐거움 때문에’가 52.3%로 가장 많았다. 60대 나이에 이르러도 스스로 아직 ‘일을 그만 둬야 하는 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뒤이어 ‘생활비에 보탬이 되어서/돈이 필요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35.0%로 나타났다. 정년을 맞아 은퇴한 이후에도 여전히 생계 문제가 걸림돌이 되는 고령층이 상당하다는 의미다. 이외에 ‘집에 있으면 무료하여/시간을 보내기 위해’(5.6%), ‘사회가 아직 나의 능력(기술)을 필요로 하므로’(5.0%), ‘건강을 유지하려고’(2.1%) 순으로 이어졌다.
특히 최근 국민연금 수급연령을 점진적으로 65세에서 68세까지 늘리는 연금개혁 방안이 제시되면서 계속근로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안 그래도 정년퇴직 이후 연금을 받기 전까지 소득이 없는 ‘소득 크레바스(틈)’가 현재 5년이나 되는데, 정년연장 논의가 서둘러 이뤄지지 못하면 이 기간이 무려 8년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노동계는 법정정년을 현행 만60세에서 65세 이상으로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한국노총이 제안한 국민동의청원은 5만명 동의를 얻어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회부된 상황이다. 한국노총 측은 “정년연장은 국민연금법에 따른 노령연금 수급 개시 연령과 일치시켜 단계적으로 늘려나가 소득 공백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고령자의 고용안정과 적정 임금을 보장하고 이를 통해 노후 빈곤 예방과 고령자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부는 법정정년을 연장하기보단 ‘계속고용’으로 고용을 연장하는 방식에 무게를 두고 있다. 법적으로 정년을 연장하면 오히려 청년 취업에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직무·성과 중심의 임금체계 개편과 연계해 재고용·정년 연장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진행할 방침이다. 현재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초고령사회 계속고용 연구회’를 발족해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고령자 고용확보조치’를 통해 근로자가 70세에 도달할 때까지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재고용 중 하나를 적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사실상 법정 정년 연장을 높이는 효과를 유도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비용부담을 덜면서 숙련된 노동자를 계속 고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덕호 경사노위 상임위원은 “일본에선 81.2%의 기업이 정년연장이 아닌 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활용하고 있다”며 “단순히 법으로 정년을 연장하면 취업을 원하는 청년들에게 큰 장벽과 절망이 될 수 있다. 고용연장을 위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세종=나상현 기자 na.sang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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