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손기정과 ‘1947 보스톤’

우성규 입력 2023. 9. 28.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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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골인 지점에선 누구나 주인공이다. 임진강변 철책과 경의선 철로를 돌아 42.195㎞를 완주한 마라토너에게도, 옆구리를 부여잡고 5㎞를 간신히 돌아온 초보 출전자에게도 똑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평화누리 결승점에선 11일 오후 내내 출전한 8000여명의 드라마가 이어졌다."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동아일보, 손기정의 첫 부인 강복신을 중매하고 결혼 소식을 단독 보도한 조선일보 등을 제치고 국민일보가 손기정 평화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각자 자신의 마라톤을 완성한 주자들의 행복한 얼굴을 현장 기사로 전할 수 있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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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규 종교부 차장


“마라톤 골인 지점에선 누구나 주인공이다. 임진강변 철책과 경의선 철로를 돌아 42.195㎞를 완주한 마라토너에게도, 옆구리를 부여잡고 5㎞를 간신히 돌아온 초보 출전자에게도 똑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 평화누리 결승점에선 11일 오후 내내 출전한 8000여명의 드라마가 이어졌다.”

2006년 11월 경기도 파주 현장에서 송고한 기사의 리드다. 당시 경찰서를 출입하는 사회부 사건팀 소속이던 기자는 국민일보가 주최하는 ‘2006 손기정 평화마라톤대회’ 취재를 위해 체육부로 하루짜리 총을 맞는다(파견 취재를 뜻하는 기자들의 은어). 체육부 선배들로부터 이색 참가자를 취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육중한 IBM 노트북을 등에 메고 파주 벌판을 헤매다 곧 다리가 풀려버린 기자는 ‘아하, 골인 지점에서 취재하면 되겠네’라고 뒤늦게 요령을 깨닫는다.

이후 현장에서 지켜본 결승점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지쳐버린 자신의 파트너 대신 생면부지 참가자의 도움으로 노끈을 붙잡고 완주에 성공한 시각장애 1급 마라토너 이흥의씨. 손기정과 같은 평안북도 출신으로 비무장지대(DMZ) 너머 북녘땅을 응시하며 10㎞를 뛴 계훈중씨 등의 사연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의 동아일보, 손기정의 첫 부인 강복신을 중매하고 결혼 소식을 단독 보도한 조선일보 등을 제치고 국민일보가 손기정 평화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무엇보다 각자 자신의 마라톤을 완성한 주자들의 행복한 얼굴을 현장 기사로 전할 수 있어 뿌듯했다.

“당신들은 바쁘면 차를 타지만 우리는 바쁠 때면 두 다리로 달립니다.” 1947년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의 우승 직후 손기정 감독이 ‘어떻게 우승하게 되었느냐’고 물어온 외신 기자들에게 내놓은 답변이다. 1983년 한국일보가 출간했고 지난해 휴머니스트가 복간한 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에 기술돼 있다.

서윤복은 국제대회에서 태극기를 달고 우승한 최초의 선수였다. 1935년 11월 일본 도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손기정이 세운 마라톤 세계 최고 기록 2시간26분42초를 12년 만에 제자가 경신하며 2시간25분39초라는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지도자로서 손기정은 시상대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그날 서윤복이 무척이나 부러웠다고 회고한다.

영화 ‘1947 보스톤’을 관람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 시상식 현장에서 월계수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린 손기정, 손기정이 1등한 것보다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묘목을 가진 것이 부러웠다는 3위의 남승룡, 가난과 모친상의 아픔을 딛고 보스턴 마라톤에서 우승한 서윤복 등 각자의 레이스가 완성도 높게 그려진 작품이다. 선수로서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출전해 마지막까지 완주하는 남승룡 역할의 배우 배성우의 연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영화에서 손기정의 스승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의 교사 김교신을 주목해 준 점도 고마웠다. 손기정 자서전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으나 일본인 데라시마 젠이치가 펴낸 ‘손기정 평전’은 김교신이 손기정의 일본 올림픽 대표 선발전을 겸한 1935년 메이지신궁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할 당시 현장에 있었다고 전한다. 당시 양정고보 농구부 감독이었던 김교신은 육상부 김연창 선생과 함께 택시를 타고 손기정을 응원했다. 영화에서 손기정이 보스턴에서 자전거를 타고 응원했듯 말이다. 김교신은 1940년 양정고보를 사직하고 ‘성서조선’ 발행에 전념했으나 일제의 공안몰이로 잡지를 폐간당하고 복역한 뒤 흥남 질소비료공장에서 근로자들을 돌보다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사망한다. 해방을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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