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안의 시선] 사족이 된 이재명의 단식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구속을 면했다. “위증교사 혐의는 소명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한 서울중앙지법 유창훈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기각 사유에서 향후 재판의 전운이 감지된다. ‘방탄용’으로 불린 이 대표의 단식은 효과를 봤을까.
지난 23일까지 이어진 단식은 야당 대표의 결단이라는 점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비교되곤 한다. 단식 기간이 24일로 YS(23일)를 넘어섰다는 점도 부각된다.
YS 기록 넘어선 이 대표의 단식
당시 현장 취재진의 관심은 식사에 집중됐다. 하루는 전 전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이 면회를 마치고 나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병원을 나서려는 이들에게 따라붙어 “전 씨가 식사를 했나요?”라고 물었다. 그런데 전 전 대통령의 아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는 게 아닌가. 일행 모두 동작 그만 상태가 됐다. 아들은 고개를 돌리더니 성난 얼굴로 “전 씨?”라며 언성을 높였다. 부친을 ‘씨’라고 호칭하자 화가 난 모양이다. 당황해서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기자들이 안 보인다. ‘전 전 대통령’으로 정정할까 망설였으나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아 “예, 전 씨…”라고 반복했다. 잠시 노려보더니 병원을 떠났다.
검찰에 반발했던 전두환 선례도
단식자 주변엔 이처럼 사나운 기운이 감돈다. 얼마 뒤 법정 방청석에서 “전두환, 노태우 이 살인마들아”라고 소리친 고 강경대 군(시위 중 사망)의 아버지가 전 전 대통령 아들에게 폭행당한 사건이 벌어졌을 정도다.
지난주 국회의 체포안 가결 뒤 민주당 분위기를 보면서 28년 전의 살벌함이 떠올랐다. “비열한 배신행위”(정청래 최고위원)라는 극언이 나왔고 박광온 원내대표가 사퇴했다. 경찰 철망을 뜯어내던 이 대표 지지자들의 행동에서 데자뷔를 느낀다. 결과를 놓고 보면 체포안 가결파가 이 대표도 살리고 당도 살린 셈인데, 색출까지 벌이는 비민주적 행태가 섬뜩하다.
단식은 후유증이 오래간다. 쇠약해진 몸으로 수사와 재판을 받아야 하는 전 전 대통령이 그랬다. 기자들은 의료진에게 영양 섭취에 관한 질문을 쏟아냈다. “미량의 설탕을 섭취했다” “동치미 국물을 마셨다” “쌀뜨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켰다”는 브리핑이 연일 이어졌다. 27일간 단식으로 체중이 10㎏ 이상 빠졌고 전 전 대통령 첫 공판은 3주 연기됐다.
녹색병원에 입원한 이 대표의 건강 상태는 상세히 공개되지 않았다. 이 대표는 지팡이를 짚고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러 걸어 들어갔다. 오상우 동국대 일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금식을 오래 하면 근육 손실이 생겨 몸무게가 줄고 뇌 기능도 떨어진다”며 “특히 당뇨 환자는 코마 등 극단적인 상태로 갈 수 있기 때문에 면밀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YS는 단식 8일째 서울대병원에 강제 이송됐다가 단식 종료 21일 뒤 퇴원했다. 전 전 대통령의 경우 경찰병원에서 73일 만에 안양교도소로 돌아갔다. 이 대표 역시 상당 기간 치료가 불가피해 보인다.
극한투쟁인 단식은 반전을 부른다. 전두환 정권에 목숨 걸고 맞섰던 YS는 대통령이 된 뒤 전 전 대통령의 단식을 지켜봤다. 전 전 대통령 내외는 경찰병원 입원 중 차남 재용씨가 득남하자 모처럼 웃었다. 27년 뒤 그 손자가 할머니·할아버지의 비자금 의혹을 폭로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이 대표의 단식 역시 반전의 연속이다. 지난 6월 19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제 발로 출석해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겠다”던 그가 표결 전날엔 페이스북에 부결을 호소했다. 가결로 반전이 일어나더니 영장기각으로 상황이 뒤집혔다. 기세등등하던 검찰이 무리한 영장 청구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혁신안 지켜야 ‘방탄’ 오명 벗어
단식 와중에 민주당의 민낯이 드러났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한다던 이 대표의 공언이 빈말인 점, 친명계는 지난 6월 혁신위원회의 1호 혁신안(불체포특권 포기)조차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 법원이 영장을 발부해도 승복할 뜻이 없었음이 명확해졌다. 단식은 안 하니만 못했다.
‘YS의 단식’과 ‘전두환의 단식’을 섞은 듯한 ‘이재명의 단식’은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YS 계승은 방탄 논란 속에 물 건너갔다. ‘전두환 단식’의 후계자로 남지 않으면 선방이다. 이 대표와 민주당이 마주할 고비마다 혁신의 약속을 지켜야만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될 체포동의안이 시금석이 될 것이다.
강주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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