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인터뷰] 감독 강제규① “영화는 관객을 만날 때 완성된다”

홍종선 2023. 9. 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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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임시완 주연 신작 영화 ‘1947 보스톤’ 27일 개봉
영화 ‘1947 보스톤’ 감독 강제규 ⓒ이하 롯데엔터테인먼트·㈜콘텐츠지오 제공

눈앞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듯, 잊히기 쉬 운 게 유명인의 숙명이다. 하지만 뉴스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아도 좀처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들도 있다. 영화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 강제규처럼 말이다.

한국영화에 르네상스를 가져왔다고 공공연히 평가받는 강제규 감독. 한국영화사가 분서갱유되어 잔 나뭇가지는 사라지고 굵은 줄기만 남는다고 해도, 아니 통째로 사라져 새로 쓴다 해도 반드시 등장할 이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계의 주역이 바뀌는 게 순리인 것은 잔인하다 할 만큼 명징한 사실이다. 그러한 도도한 흐름 앞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더군다나 개봉작이 드물었는데 다시 기회가 왔고, 오랜만에 신작을 내놓는데 대작이고, 블록버스터인데 대단한 경쟁력을 갖추었다면 행운이나 축복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바탕에 자리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이 궁금했다. 하다못해 손 하나만 해도 세월의 흔적이 여실한데, 녹슬어 삐거덕 소리 나지 않게 옹골찬 재미와 뽐내지 않는 완성도를 갖춘 신작을 내놓은 비결이 몹시 궁금했다.

강제규 감독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만들고 재미를 빚는 것은 인물 간의 관계성이다” ⓒ

영화 ‘1947 보스톤’(감독 강제규, 제작 ㈜비에이엔터테인먼트·㈜빅픽쳐,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콘텐츠지오)을 보면 기본 스토리를 실은 수레를 차분히 운전함과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관계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인물간의 관계와 감정이 영화에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영화를 풍성하게 한다. 사건만으로 인물이 얽히는 게 아니라 감정으로 얽혀야 더욱 차지게 재미있다는 기본을 새삼 깨닫게 하고, 그것이 영화에서 구현되면 어떤 모습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봐요(웃음). 완성된 영화를 선보인 건 많지 않지만, 기획하고 시나리오 쓰고 엎어지고…, 완성되지 않은 영화들이 존재했습니다. 시나리오나 프리 프러덕션(사전 제작)에서 엎어진, 관객들은 모르시는 많은 작업을 통해서 ‘영화에 대해 더 어려워지는 지점 있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면들이 있었습니다. 큰 플롯, 서사구조, 소위 말하는 ‘드라마에 충실한 기승전결’이라는 작품의 원형, 본질도 너무너무 중요한데 이것이 과연 어디서 정점을 이루고 꽃을 피우는가는 ‘인물과 인물 간의 관계성’에서 파생된다는 것, 재미도 거기에서 파생된다는 걸 너무 알겠는 거예요.”

“(하정우가 표현한 손기정, 임시완이 분한 서윤복, 배성우가 연기한 배성우뿐 아니라) 백남현, 김상호 배우가 맡은 역할까지 그 인물들이 반응하고 부딪혀가고 그 과정들이 저한테는 소중했고. 그 과정을 잘 추슬러 가져가는 것이 이 영화의 밀도와 재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것이 될 것이다, 라는 판단이 촬영 전부터 서 있었지요.”

“그 강도가 갈수록 강해져요. 지금 준비하는 다른 것들도 제가 최고의 역점을 두고 신경 쓰고 들여다보고 하는 면이 바로 ‘과연 관계성이 적절한지, 충분히 표현되어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좌절을 셋업할 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

마치 질문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주저 없이, 차분히 설명해 가는 모습을 보고 내용을 들으며 두 가지 지점에서 놀라웠다. 아, 천하의 감독 강제규도 소위 말해 ‘엎어지는’ 일을 수없이 겪는구나. 과거의 영광을 의식하며 고난의 지점에서 배로 좌절할 법도 한데, 작품의 밀도와 재미를 파생시키는 원천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시간으로 삼을 만큼 단단한 멘탈을 지녀서 ‘1947 보스톤’이 그리 탄탄하구나!

맞다, 영화는 감독의 캐릭터가 외화된(밖으로 표현된) 예술적 덩어리다. 그래서 흔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 당연한 기본이 최근엔 종종 무너진다, 감독이 달라져도 비슷한 붕어빵이 안정적으로 찍혀 나온다는 과신이 횡행한다. 영화 ‘1947 보스톤’이 왜 그리 클래식하게 느껴졌을까, 지금은 이유를 모르게 좋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나리라는 막연한 전망이 왜 드는 걸까, 싶었는데 감독 강제규를 만나보니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지금 이 글의 설명력이 부족하다면, 안개가 시원하게 걷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롯이 필력의 부족이 원인이다. 부족한 글로나마 조금 더 강제규 감독의 말을 옮겨 구체성을 더하고 싶다. 캐스팅에 대해서다. 주․조연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사가 거의 없는 배우들까지 ‘1947 보스톤’에는 구멍이 없다. 카메라가 자신을 포착하든 아니든 그저 열심히 그 인물로 작품 안에서 살고 있다.

등장만 해도 영화가 밝아지는 에너지를 지닌 배우 박은빈 ⓒ

특히 놀라운 것은 특별출연 배우 박은빈(옥림 역)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 그 욕심내지 않는 절제의 시선이다. 촬영 후 개봉 전, 박은빈은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통해 전 국민적 사랑을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있는 촬영 분, 없는 분량 죄다 쥐어 짜내서 편집해도 아무도 손가락질 할 사람 없다. 아니, 관객을 생각한 서비스라고 자화자찬할 수도 있다. 감독 강제규의 선택은 달랐다.

“드라마 청춘시대(시즌1, 2016)를 보고 매력에 빠졌어요. 아주 명랑, 명랑이라기보다는 참 언유주얼(unusual, 흔치않은 또는 색다른), 범상치 않은 배우가 하나 나왔구나. 사실은 그때도 대본을 주기가 민망했어요. 국밥집 딸로서, 핸섬하고 달리기 잘하는 윤복에게 뭐 하나라도 더 주고픈 짝사랑, 조금 조미료 같은 느낌으로 인물이 가미돼 있었던 정도니까요. 그런데 (정작 박은빈 본인은 촬영하니) 그런 거 하나 없이 잘했어요, 너무 잘했죠.”

“그래요, 찍어 놓은 거 더 있어요. 윤복이 엄마 산소 가서 승리해서 돌아왔다고 함께 고하고 동네 산길, 무악재 고개 걸어내려 가는 장면이에요. 시나리오에 있었고, 실제 촬영도 했는데. ‘아니야. 투 머치야(too much, 과한). 이 감정을 보고 싶지는 않아’, 넣지 않았죠. 사실은, 주변에서 ‘그런 걸 넣어서 은빈이 살려야지’ ‘예쁘게 잘 찍어놓고, 왜’, 그런 얘기들 있었죠. 모르겠어요, 저는 낯간지럽고, 은빈 배우를 위해서도 옳지 않은 것 같고, 관객 분들도 좋아하실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쇼잉(showing, ‘보여 주기’식 전시)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다, 서로에게 도움 되지 않는다, 은빈 배우를 위한 것 아니고 영화 위한 것도 아니다 판단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옥림의 짝사랑, 승리 후 인생의 한숨 돌린 윤복, 이제야 시작되는 첫사랑을 관객인 우리가 상상하는 쪽이 아름답다. ‘썸’도 타기 전에 급격한 진전은 옥림의 순수한 인간미를 퇴색시킨다.

암울한 시대, 먼저 등불을 밝힌 이들이 있어 오늘의 역사가 밝다. 한 명 한 명 공들여 캐스팅한 육상구락부 선수들 ⓒ

박은빈만이 아니다. 윤복 어머니 역의 서정연, 남승룡 부인 역의 박효주, 옥림이 엄마이자 국밥집 주인 역의 정영주, 윤복이 친구 동구 역의 오희준 등 특별출연 배우들의 연기가 좋다. 서윤복과 함께 ‘제2의 손기정’을 꿈꾸며 마라톤 훈련에 정진하는 육상구락부 선수들로 등장하는 배우 김성대, 류해준, 이형지, 안태준. 구자건, 서동규, 황자능, 박한율 등은 흡사 진짜 마라토너들처럼 성실히 연기한다. 배우 보는 남다른 안목의 비결을 물었다.

“저의 집사람(배우 박성미)이 지금은 활동하지 않지만 연기자잖아요. ‘주변에 연기하는 후배, 선배 많은데 왜 내 주변 배우는 한 명도 써 주지 않느냐’고 투정할 때가 있어요. 제가 ‘드라마 더 많이 하면, 필요한 캐릭터 생기면 쓰지 안 어울리는데 어떻게 쓰냐?’ 답해요. 대사 많고 적고 조연 단역 떠나서, 영화 하는 과정 떠나서, 어떻게 보면 다른 감독들에 비해 자기 검열을 철저히 하는 게 캐스팅인 것 같아요. 육상구락부, 서윤복과 달리는 선수들이잖아요. 한 명 한 명 직접 했어요. 특별히 많은 대사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마라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달리기 좋아하는지, 달리고 있는 친구들인지, 서윤복과 달렸을 때 어울리는 배우들인지…, 오디션 굉장히 까다롭게 합니다.”

강제규 감독은 “안목일 건 없고”라는 말로 시작했다. 그 후 설명한 게 위 문장들이다. 안목이 아니라 결국 시간과 공을 들인, ‘엉덩이 힘’으로 물 샐 틈 없는 배우 진용을 구축한 것이다.

감독 강제규 “영화는 관객을 만날 때 완성된다” ⓒ

묻고 싶어졌다. 애초 12번으로 준비해 간 질문이기도 했지만, 얘기를 나누다 보니 더욱 묻고 싶었다. 감독 강제규의 경쟁력은 무엇인가요?

“글쎄요, 경쟁력까지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어릴 때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영화는 왜 만드는 거야? 예술가들이 만족을 위해 충족을 위해, 나도 그렇게 만들고 싶어서 시나리오 쓰고 제작하는 것 아니야? 제 답은 ‘아니다’였습니다. 결국은 관객이라는 대상이 무엇인가, 누구신가, 지금도 계속 생각하는 질문입니다.”

“누군가 물어요. ‘너, 영화 언제 완성되니?’. 디아이(Digital Intermediate, 영상에 색보정과 디지털 효과를 추가하여 최종 이미지를 완성하는 과정) 하고, 기술시사 끝났을 때 문제가 없으면 완성인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관객에게 공개가 되고, 관객이 이 영화를 봐야만 완성되는 것이다. 모든 관객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느냐가, 어떻게 가슴에 새겨지느냐가 완성품이다. 내가 완성한 것은 허상이다, 관객 누군가에게 파고들어갔을 때 새겨진 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관객 분들 모시고 블라인드 시사를 4번 했어요, 한 번 하기도 싫어하는데. 관객이 영화를 완성하기 때문에, 관객과 얼마나 소통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관객 분들 말씀 들으면 그 장점이 있으니까 하고 또 했습니다. 덕분에 영화 ‘1947 보스톤’에도 그 부분을 많이 반영할 수 있었고요. 그것이 나의 작은 장점입니다.”

바로 오늘 개봉, 이제 당신이 영화 ‘1947 보스톤’을 완성할 때 ⓒ

작지 않다. 결코 작지 않다. 강제규라는 감독의 영화를 만드는 진심이 고스란히 전해 와 소름이 돋았다. 많은 영화인이 말한다, 내가 아니라 관객을 위해 연기한다, 제작사가 아니라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같은 말인 듯하나 다른, ‘영화는 관객과 만날 때 완성된다, 관객의 마음에 무언가로 새겨진 순간에 완성된다, 관객들 마음에 새겨진 무늬가 내가 만든 영화의 완성품이다’라는 바탕 생각이 전율을 불렀다.

기호학에서 흔히 의미가 언제 형성되는가를 두고 텍스트 결정론과 수용자론이 충돌한다. 작품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고, 서로 다른 수용자의 감상도 텍스트 안에 심어진 것들이 씨앗이 되어 파생된 것이라는 ‘텍스트 결정론’. 작품이라는 텍스트를 본 수용자가 어떤 생각과 감성을 지니게 되는 순간에 의미가 유의미하게 발생한다는 ‘수용자론’.

수용자가 아니고, 작품을 만드는 제1 생산자가 ‘관객이 영화를 완성한다’는 생각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일까. 그것도 자신의 색깔을 뚜렷이 작품에 드리울 아는 연출자가 말이다. 관객을 중심에 두고 영화를 만드는 것을 넘어 내가 만든 것은 허상이고 관객의 마음 안에서 작품이 완성된다는 생각을 품은 거장 감독의 ‘1947 보스톤’, 그 완성자가 되는 기쁨을 누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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