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중퇴한 섬유회사 직원, 한국 총체 예술 이끌다
영국에서 상륙한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에 미술계 관심이 온통 쏠린 이달 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는 또 다른 중요한 이벤트가 벌어졌다. 이곳에서 개인전을 하는 미술가 김구림(87)의 전시 연계 공연이었다. 미술가가 만든 공연이라니. 김구림은 현재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개최 중인 ‘한국 실험미술 1960∼70년대’전에 이건용·성능경·이강소·이승택 등과 함께 초청된 원로 중 한 명이다. 퍼포먼스와 대지미술 등으로 실험미술을 대표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는 미술가로 호명됐다. 그런데 이날 무대는 김구림을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총체적 예술가로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다른 작가들에게는 없는 김구림만의 이미지다. 지난 24일 전시장 현장에서 작가를 만났다.
그날 무대에 올라온 건 실험영화 ‘1/24초의 의미’와 ‘문명, 여자, 돈’, 무용 ‘무제’, 음악 ‘대합창’, 연극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모두 1969년 작인데, 놀랍게도 그는 이때가 서울의 한 섬유회사 기획실장으로 일하던 시절이라고 했다.
김구림은 경북 상주의 부잣집에서 외동으로 태어났다. 집안 대대로 대구에서 한의사를 했다. 벽시계도 없던 시절에 손목시계를 차고 초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에서 백화점, 극장 사업을 벌이며 가세는 기울었다. 그는 경주예고를 거쳐 경주 계림예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배울 것이 없다며 1년 만에 중퇴했다.
군대는 의가사 제대했다. 미술은 계속하고 싶어 독학으로 배우며 1959년 대구에서 첫 개인전을 했다. 그해 대구의 한 섬유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부산으로 직장을 옮겼던 그는 큰물에서 놀겠다며 1968년 서울의 섬유회사로 다시 옮겼다.
“섬유회사에서는 CF광고를 찍고 모델을 섭외하는 일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영화를 공부하게 됐고, 첫 실험영화 ‘문명, 여자, 돈’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 ‘문명, 여자, 돈’ ‘1/24초의 의미’에는 모두 개발 연대 도시의 성장과 그 속에서 소외된 도시인의 권태가 흐른다. 흥미롭게도 출연진들이 누에고치처럼 흰옷으로 몸을 감싸고 두건을 덮어 얼굴을 가리고 나오는 무용 ‘무제’에서도 어느 순간 두건을 벗은 남자가 하품을 한다.
김구림의 총체적 예술은 섬유회사에서 일하며 영상을 접했기에 가능했다. 1970년대의 그는 무용계에서도 러브 콜을 받은 예술인이었다. 하지만 CF광고를 담당한다고 누구나 이런 전위적인 작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콘텐츠는 어디서 어떻게 배운 것일까.
“미대 중퇴 후 대구에서 살면서 헌 책방을 자주 다녔습니다. 어느 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라이프지에서 잭슨 폴록이 물감을 흘리면서 그린 추상화를 봤습니다. 타임지에 문화 소식이 실렸습니다. 두 미국 잡지를 통해 미술 무용 영화 연극 음악 등 미국의 최신 예술 경향을 알게 됐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현대미술가) 머스 커닝햄이 고압선 아래서 빙빙 돌면서 그걸 무용이라고 하는 걸 읽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전까지 사실주의적인 풍경화를 그렸는데, 예술이라면 이런 새로운 걸 해야 되는구나 생각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콘사이스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 단어를 찾아가며 떠듬떠듬 읽은 라이프지와 타임지가 그의 현대예술 스승이었던 셈이다.
1959년 개인전 이후 직장생활을 하는 가운데 지역 청년 화가들과 어울렸다. 미술단체 ‘앙글’ 등을 조직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는 1960년대 초기작인 ‘태양의 죽음’ ‘핵’ 등 기하학적 형태의 어두운 추상화를 볼 수 있다. 김구림은 “당시 군대에서 의가사 제대를 했는데, 후방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가던 동료 군인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이 컸다. 그게 이 시리즈로 이어졌다”고 전했다. 핵 시리즈는 얼핏 유럽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화단에서 유행한 추상화인 앵포르멜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그릴 때 붓을 사용하지 않았다. 패널 위에 비닐을 바르고 불을 붙이면 석유가 붙은 부분이 타오르는데 이때 담요 등을 이용해 불을 끄고 남은 흔적이 작품의 골조가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그리지 않은 회화’다.
독학으로 서구의 개념미술을 접한 김구림의 시도는 거침이 없었다. 플라스틱 전구를 사용한 ‘전자예술’, 잔디를 불태우고 새순이 돋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지미술 ‘현상에서 흔적으로’, 시간성을 얼음을 이용한 설치미술로 시각화한 ‘현상에서 현전으로’ 등이 그 시절 탄생했다. 비주류 청년화가 김구림의 이름은 미술계에 알려졌다. 마침내는 서울대 출신들과 ‘68회’를 결성했다. 1970년에는 제4집단을 결성해 죽음을 상징하는 관을 메고 깃발을 들고 가두행진을 했다. 그는 회장인 자신을 ‘통령’이라고 지칭했다. 이런 행보가 당시 박정희 정권의 눈에 불온하게 비쳤다. 제4집단은 해체됐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일본으로 떠난다.
일본에서의 3년여 체류 기간 도쿄에서 개인전도 했다. 시로타 화랑 전시에서는 빗자루, 삽 등 기성품을 활용한 설치미술을 했다. 신제품 삽을 고고학 유물인 것처럼 변색시켜 시간성을 전시한 것이 화제가 됐다. 그는 “일본에서 돌아오니 유명해져 있더라”고 회고했다.
후배 화가 이건용, 성능경 등이 참여한 ST그룹에도 관여하며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일본에서 판화를 배워 ‘도쿄 국제판화비엔날레’에 출품한 ‘걸레’는 식탁보 위에 걸레와 물의 흔적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1981년 동아국제판화비엔날레에 비슷한 작품을 제출했지만 이게 판화냐 논란 속에 출품이 거부되기도 했다. 작품마다 논란을 일으키는 문제적 작가로 김구림을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1970년대의 대표 화가로 신문에 소개하기도 했다.
김구림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체류하던 시절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 미국으로 가야한다는 조언을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어 실력이 부족해 미국 비자 심사에서 3번 떨어졌다. 더 이상의 기회가 없어 포기해야 할 시점이었다. 곰곰 생각하던 그는 미국 대사가 참석하는 연말 파티에 참여해 ‘번개 연설’을 했다. “미국은 기회의 나라인데, 언어로 기회를 막는 게 말이 되느냐”는 취지였다. 덕분에 미국행 비자를 쥘 수 있었다.
뉴욕에서 ‘아트 스튜던트 리그 오브 뉴욕’에서 수학했다. 박래현 김창렬 등이 다닌 학교였다. 연말 학생 평가에서 판화와 회화 두 부문 모두에서 대상을 받았다. 뉴욕에서 주목을 받으며 지금 현대미술의 거장이 된 브루스 나우만 등과 그룹전을 하는 기회를 갖기도 했다.
미국 생활은 첫 번째 아내의 뉴욕 출현으로 2∼3년 만에 청산하게 됐다. 귀국한 그는 기회를 봐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갔고, 특히 캘리포니아 산타아나의 모던 뮤지엄 오브 아트에서 개인전(1991) 제안을 받은 뒤로는 본거지를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그 곳에서 지금의 아내 황선희를 만났다.
김구림은 2000년 10년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현 아르코미술관)에서 개인전 제안이 온 것이 계기였다. 귀국 이후 김구림은 미술계에 착근하고 있다. 201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에 이어 생존 작가 최고의 꿈인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이번에 하게 된 것이 그런 증거다. 3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며 김구림을 가능하게 한 세 가지 키워드로 ‘리베로, 비엘리트, 노마드’가 생각났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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