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음과 낭만, 그리고 자연…‘힙’한 공간의 조건
2000년대까지만 해도 주말 사람이 몰리는 곳은 대형 복합쇼핑몰이었다. 쾌적한 실내에서 식사와 쇼핑을 하고, 영화관람과 도서 구입 등 문화생활까지 가능하니 이보다 편리한 곳이 없었다.
2010년 이후 골목이 뜨기 시작한다. 신사동 가로수길이 핫해지더니, 경리단길에서 찍은 사진이 소셜네트워크(SNS)를 메워나갔다.
2015년 A 카드사가 서울 등 주요 상권의 매출액 변동에 따른 성장세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경리단길은 2013년 이후 3년간 A 카드 매출액이 연평균 49%씩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유행에 민감한 20대의 매출액 증가세는 강남, 이태원, 홍대 앞 등 전통 상권보다 가로수길, 경리단길, 연남동 등 위성 상권에서 더 컸다.
경리단길을 시작으로 서울 도심 곳곳에 ‘O리단길’이 생겨났다. 망원동의 망리단길, 9호선 송파나루역에서 석촌호수 방향으로 이어지는 송리단길, 도봉구 쌍문동과 창동 일대의 쌍리단길, 용산역과 신용산역 주변의 용리단길이 대표적이다. 익선동과 성수동, 을지로에도 사람들이 몰렸다. 전국 인쇄사업체의 30% 가까이가 몰려있던 낡은 동네 을지로는 새롭고 개성있다는 뜻의 ‘힙(hip)’을 붙인 ‘힙지로’로 불리고 있다.
뜨는 거리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오래되고 낡았어도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장소. 그곳에는 꾸며진 빈티지를 넘어 옛 추억이나 이국의 느낌을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풍경이 있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수입 가구 상점과 인테리어 가게가 몰려들면서 앤티크 거리로 불렸는데 이후 아기자기한 소규모 의류 매장과 카페가 하나둘 자리잡으면서 유럽 골목 같은 패션 거리의 모습을 갖췄다.
경리단길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저렴한 밥집과 시장이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정착한 외국인이 수제 맥주나 자국의 먹거리를 팔고, 예술인들이 작은 공방과 소품가게를 열면서 경리단길만의 색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망리단길은 전형적인 주택가에 망원시장이 있어 한국 특유의 정서를 품었다. 익선동은 좁은 골목에 옛 한옥이 들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색적인 분위기로 핫한 장소가 됐다.
부동산업계에서는 부활하는 상권의 공통점으로 낡은 회색빛 동네, 저렴한 임차료, 편리한 교통을 꼽는다. 산업화의 흔적이 남은 곳에 개성 강한 상점이 자리잡아 낡음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구도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에는 재개발을 할 때 부지를 모두 밀고 새 건축물을 신축하는 것보다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골목을 유지하고 그 주변에 접한 건축물만 고층으로 신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런데 뜨는 거리에는 자연이라는 또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다. 사면이 막힌 쇼핑몰과 달리 골목에는 변화하는 하늘이 있고, 바람이 분다. 거리를 걷고 싶게 만드는 가로수가 생명력을 뿜어내거나 가까이 대형공원이 있는 식이다.
신사동 가로수길은 한강둔치공원이 가깝고, 경리단길은 남산공원으로 이어진다. 성수동은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모델로 조성한 서울숲공원이 바로 옆에 자리했다.
‘팝업 성지’ 성수동은 십수 년 전만 해도 공장이 즐비한 낡고 회색빛이 감도는 동네였다. 허름한 공장 건물 위층에 가구 갤러리가 들어서고, 이색 카페에 예술 전시와 공연이 이어지면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유행을 선도하는 소비층을 찾아 명품업체와 자동차회사가 쇼룸과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팝업은 한달 내외의 짧은 기간 기업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던지고 사라지는 임시 매장이다.
성수동에서도 ‘팝업 핫플’로 꼽히는 연무장길의 경우 세 집 건너 한 집이 팝업이다. 팝업 매장이 많다는 것은 유행을 선도하는 동네라는 뜻이다. 주요 브랜드의 플러그십스토어(주력 매장)도 연이어 들어섰다. 거리 곳곳이 복합쇼핑몰이다. 외부 공간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만 기존의 쇼핑몰과 다른 셈이다.
성수동은 대학생이나 직장인들만의 거리가 아니다. 주말에는 커플이나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이 거리를 채운다. 서울숲에서 휴식을 취한 뒤 공원에서 이어지는 성수동 골목길을 찾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자연과 도심 속 볼거리를 함께 즐기고 싶은 도시민들에게는 제격이다.
성동구는 성수동 상권에 불어 온 활기가 서울숲 등 주변 도시 시설과의 시너지 효과를 통해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고, 젠트리피케이션을 막을 수 있는 행정 지원책 발굴에 고심하고 있다.
자연 요소가 공간에 활기를 가져다 준 사례는 청계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울시는 수명이 다한 청계고가로와 복개된 청계천로를 철거해 2005년 지금의 청계천을 완성했다. 동아일보가 있는 청계광장에서 성동구 신답철교까지 5.8㎞ 구간에 물길을 끌어오고 가로수를 심어 도심에 친수공간을 조성했다.
청계천에 물이 흐르면서 일대는 쾌적해졌다. 기상청 산하 기상연구소 측정 결과 복원 후 청계천 주변지역 기온이 복원 전보다 1.3도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청계천 수변 모든 지역의 풍속도 복원 전보다 빨라졌다.
복원 직후 342종이던 서식 생물종은 지난해 666종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청계천에 심은 수생식물과 가로수가 자라면서 녹지공간은 점차 넓어지고 있다. 매년 봄이면 750주 이상 식재된 이팝나무가 하얀 쌀밥같은 꽃망울을 터뜨린다.
청둥오리와 왜가리, 쇠백로는 자연에 목마른 시민들에게 생태적인 볼거리를 제공한다. 징검다리를 건너는 재미도 삭막한 도시의 사람들에겐 매우 이색적인 경험이다.
가장 직접적인 기대효과는 도심 정비다. 우중충한 고가 도로에 갇혀 슬럼화가 진행되던 구도심의 환경이 쾌적하게 개선됐다. 서울연구원 연구에서 청계 복원 후 보행량이 늘고, 종로를 포함해 모든 방향으로 가로 접근성이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청계천에는 일평균 3만~5만명의 발길이 이어진다. 수질 관리와 건천인 청계천에 물을 끌어오는 비용이 과도하다는 논란이 있지만, 앞서 서울학연구소가 진행한 조사에서 서울 도심에서 시행된 주요 20개 사업(1995~2010) 중 시민 만족도가 가장 높은 사업으로 평가됐다. 청계천이 관광객들에게 서울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서울시는 녹지 확대 정책을 도시개발사업에 다각적으로 접목하고 있다. 지난해엔 건폐율을 축소하는 대신 건물 높이와 용적률을 완화하고, 민간 개발업자들에게 부지를 기여받아 공원·녹지로 조성하는 ‘녹지생태도심 재창조 전략’을 도시 재개발사업에 도입했다.
재개발 블럭마다 1곳 이상 공원을 조성하고 공원과 공원을 보행로로 연결해 현재 4%인 4대문 안 녹지율을 장기적으로는 15%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도심에 녹지공간을 확대하는 것이 홍수 조절과 열섬현상 완화 등 도시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 쾌적한 도시를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판단한 것이다.
지난해 8월 완료된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사업도 녹지와 쉼터가 풍부한 ‘공원같은 광장’을 조성하는 데 주안을 두고 추진됐다. 세종문화회관 앞 서쪽 차로를 없애 총 광장의 면적을 기존 1만8840㎡에서 4만300㎡로 2배 이상 넓히고, 키 큰 나무 300그루를 포함해 총 5000주의 나무를 심었다.
쉴 수 있는 공간을 늘리고 한글분수, 역사물길, 시간의 물길, 터널분수 등 광화문의 상징성을 소재로 한 분수시설을 만들어 광장에 생기를 얹었다. 광화문광장에선 분수에서 뛰어노는 아이들과 샘물탁자 아래서 족욕을 즐기는 시민들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 식물의 이름을 팻말에 기재해 간략한 생태 정보도 전달하고 있다.
광화문광장 유동인구는 재개장 이후 증가하고 있다. 광화문광장 주변의 시간당 유동인구는 재개장 1주일 후 2만1013명으로 2주 전 같은 시간대 1만8786명보다 11.9%(2226명)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광장에 머무는 인구 수를 정확히 산출하기는 어렵지만 녹지와 휴식공간이 늘어난 재개장 이후 광장에 머무는 시민들이 요일과 시간대에 상관없이 크게 늘어난 것은 분명하다”며 “광화문광장이 복잡한 도심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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