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가족 돌봄이 족쇄가 돼버린 아이들, 영 케어러

2023. 9. 2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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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성인에게도 힘든 가족 내 돌봄 오롯이 감당하는 아동청소년들
신체·심리·경제적 어려움에 미래 투자는 꿈도 꿀 수 없어

벼랑 끝에 선 이들을 구하려면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정부와 지자체의 간병 지원 확대와 양질의 돌봄 서비스 이뤄져야

돌봄 ‘노동’도 취업 경험으로 인정하는 제도적 차원의 노력 필요해…
다음 단계 예비할 준비의 시간 될 수 있도록 해야

영 케어러(가족돌봄아동청소년)는 더 이상 낯선 말이 아니다. 과거에는 아픈 가족을 돌보는 아동청소년을 효자·효녀라 칭찬하며, 가족 돌봄에 미래를 저당 잡힌 영 케어러의 현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몇 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돌봐오던 22세 대학생이 수입이 끊긴 상황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아버지를 방치해 숨지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는 영 케어러 문제가 만들어낸 비극을 마주하게 됐다. 질병, 고령 등으로 가족 내 돌봄과 부양이 필요한 대상은 계속 생겨나지만 저출산으로 가족 규모가 축소됨에 따라 간병을 담당할 주체는 감소해 돌봄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돌봄에 떠밀린 영 케어러의 수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누군가 돌봄을 떠맡는 순간 우리 사회는 그 돌봄이 얼마나 고단한지 망각한다. 성인에게도 힘든 돌봄 부담을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영 케어러들은 신체적, 심리·정서적, 경제적 어려움 등 복합적인 삼중고를 겪고 있다. 또래들은 학업과 취업을 위해 자격증 취득이나 인턴 참여와 같은 이력서에 적을 ‘스펙’을 쌓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반면, 영 케어러는 미래를 위한 투자는 꿈도 꿀 수 없다. 부모로부터 부양을 받아야 할 나이에 역으로 부양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자신의 미래와 가족의 생명을 맞바꿔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영 케어러는 생애주기상 교육을 받는 시기이지만 간병을 위해 학교에 못 가는 일이 빈번히 생긴다. 이는 단기적으로 학업 성취가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장기적으로는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사회 진출이 어려워지기도 한다. 또한 밤낮으로 가족을 보살펴야 하는 상황은 주변 사람들과의 교류를 차츰 멀어지게 하고, 자연스레 소식이 끊기면서 또래 관계나 사회생활로부터 고립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고립감은 심각한 스트레스를 불러와 심신이 피로해지면서 우울을 동반하기도 한다. 어린 나이에 병원비, 생계비 등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져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영 케어러를 둘러싼 중첩된 위기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력감과 절망감으로 심화되고, 종국에는 간병 살인을 저지르는 비극에까지 내몰리게 된다.

벼랑 끝에 선 이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직 영 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고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우선 영 케어러는 효자나 효녀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우리 사회와 영 케어러 본인이 깨닫게 해야 한다. 아동청소년기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를 활용해 영 케어러에 대해 알리고, 가족 돌봄의 위기에 놓인 학생이 있는지 찾아내야 한다.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 케어러를 위한 전문적인 심리상담 지원과 지속적인 정서 지지도 필요하다. 영 케어러 자조모임은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도 공감받을 수 없는 가족 돌봄의 경험을 함께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지지체계다. 자조모임 지원을 통해 영 케어러 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 유익한 정보를 교환하고 지지와 신뢰 관계를 구축하도록 도와야 한다. 영 케어러가 반복되는 돌봄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극심한 스트레스와 육체적 피로에서 해방되고 자신을 돌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단기휴식도 지원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부와 지자체는 간병 지원 확대와 양질의 돌봄서비스 제공으로 영 케어러가 돌봄이 필요한 가족과 자신의 인생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가족 돌봄을 선택한 영 케어러가 있다면 돌봄으로 인한 사회적 공백기를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다양한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그동안 가정 내 돌봄을 무급노동으로 저평가해 온 시각을 바꿔 돌봄노동도 취업 경험으로 인정하는 의미의 경력증명서를 발급해주는 등 제도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동청소년이라도 가족을 돌보거나 가사를 돕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돌봄에 인생을 갈아 넣어 학습과 성장에 지장을 초래할 정도로 부담이 지나치면 결국 아동청소년 자신의 인생이 사라지는 최악의 결과로 귀결된다. 돌봄은 정서적인 부분을 넘어 경제 부담과 체력을 동반하는 명백한 ‘노동’이다. 우리 사회가 이를 적극 인식하고 촘촘히 들여다본다면 막다른 길에 몰린 영 케어러의 미래를 구할 수 있다. 가족 돌봄이 절망이 아니라 다음 단계를 예비할 수 있는 준비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사회가 적극 지원해야 한다.

정익중 아동권리보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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