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여기서 대선 연장전을 끝내자

이하경 2023. 9. 25.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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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대기자

신군부에 의해 정계 은퇴를 당한 야인(野人) 김영삼은 1983년 독재에 항거하는 23일간의 단식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을 통해 “단식을 멈추고 해외로 나가라”고 회유했다. 김영삼은 “나를 시체로 만들어 부치면 된다”며 거부했다.

사형(死刑) 집행을 기다리다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구명돼 미국으로 망명한 김대중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항의했다. 정권이 틀어막은 김영삼 단식 사실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전 세계에 알렸다. 숨죽이고 있던 국내외 민주화 세력이 하나로 뭉쳤다.

「 이재명 특권적 ‘방탄’ 공감 못 얻어
거취 결단해 정치 혼돈 끝내야
국힘·민주 모두 중도보수 정당
강경파 다스리면 통합 정치 가능

김대중은 평민당 총재 때인 1990년 지방자치제 실시를 촉구하는 13일간의 단식을 통해 지자제를 36년 만에 부활시켰다.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것은 사리(私利)를 초월한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을 국민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양김(兩金)의 단식에는 정치적 약자의 저항이라는 공통의 정당성이 있었다. 역사를 바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24일간 단식의 명분은 ‘윤석열 정권 폭주 저지’였다. 그러나 국민의 공감을 얻는 데 실패했다. 입법권력을 가진 원내 1당 대표였고, 목적도 자신을 위한 동정 여론 조성이어서 공익(公益)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석 달 전 불체포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체포동의안 국회 표결 하루 전날 부결을 호소했다. 구차했고, ‘방탄’의 불명예만 남았다.

이 대표는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뒤 “굽힘 없이 정진하겠다”며 사퇴 요구를 거부하고 지지층 결집을 호소했다. 구속돼도 옥중에서 공천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한다. 강성 지지자들은 “배신자를 색출해 정치생명을 끊어놓겠다”고 했다. 이건 민주주의와 무관한 야만의 괴성(怪聲)이다.

이 대표가 연루된 10여 개 사안은 성남시장 시절의 뇌물·횡령 혐의 사건이다. 민주당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했다. 대선 패배 이후 성찰의 시간을 갖는 대신 서둘러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당 대표직을 움켜쥐었다. 그를 정점으로 한 거대 야당은 새 정부 출범 이후 1년4개월 동안 ‘방탄’을 위해 숱한 무리수를 두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안은 헌법재판소에서 전원 일치 의견으로 기각됐다. 한덕수 총리에 대한 뜬금없는 해임건의안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민주당은 일인자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정치적 공격성을 자랑하는 팬덤정치에 휘둘리고 있다. 팬덤정치는 충동과 분노의 소용돌이일 뿐, 그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다. 이성적인 다수를 침묵의 세계로 밀어넣는다. 이 대표는 팬덤정치에 편승해 민심과 충돌하는 폭주를 멈춰야 한다.

막스 베버의 언술을 빌리면 권력은 “나의 의지로 남을 움직이는 일”이다. 일종의 폭력이다. 잘못 사용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하필이면 그 위험천만한 권력을 다루는 직업이 정치다. 그렇기에 경전과 율법에 적혀 있지 않아도 정치인에게는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양심과 윤리가 있다. 이걸 무시하면 정치가 불신받고, 민주주의가 무너진다. 민주주의가 탄생 이후 2500년 동안 줄곧 위태롭게 항해했던 이유다.

그렇기에 이 대표가 나 하나 살자고 민주당을 사유화해 분열의 사지(死地)로 몰아넣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흔들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당을 분리시켜야 한다. 스스로 결백하다고 장담하지 않았는가. 특권을 내려놓고 개인 자격으로 당당하게 맞서 무죄를 받아낸다면 정치적으로 부활할 것이다. 한국 정치의 혼돈을 정리하기 위해 거취를 결단해야 한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길이다.

민주당은 우여곡절 끝에 방탄 정당이라는 오명(汚名)을 벗었다. 대통령을 세 사람이나 배출한 내공으로 복원력을 발휘해 민심을 수용한 결과다. 한동안 혼란의 시간이 있겠지만 위기를 넘기면 혁신의 기회가 올 것이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심(尹心)’ 쫓기에만 분주하고, 수도권과 중도의 민심에는 둔감하다. 내년 4월 총선 출마 희망자들은 텃밭인 영남과 서울 강남만 기웃거린다. 민주당이 전열을 재정비해 정권심판론을 들고나오면 힘들어질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의 실체를 영원히 볼 수 없다. 그저 시각중추가 반응하는 대로 보이는 것만 볼 뿐이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정치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귀에 거슬려도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다투되 싸우지 않는’ 화쟁(和諍)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면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보수, 진보 정당이 아니다. 중도 우파의 범주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다. 대북정책을 제외하고는 결정적인 차이도 없다. 맹목적 강경파, 충성파의 주장을 다스리면 얼마든지 타협하고 협치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스스로가 옳다는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타협해 끌고 나가는 연대의 과정이다. 이제는 대선 연장전을 끝내고 통합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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