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국뽕?… “꾸며낸 이야기로 애국주의 강요하지 않아”
“승리한 역사든 실패한 역사든 담대하게 바라보고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 소위 ‘국뽕’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지점에서 나타나는데, 이런 소재라고 해서 무조건 그 잣대를 들이댈 수 있나. ‘1947 보스톤’은 인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애국주의를 강요하고 등장 인물을 통해 그것을 구현한 것과는 다르다.”
지난 15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강제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오는 27일 개봉하는 ‘1947 보스톤’은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선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장수상회’ 이후 8년 만의 연출작이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서윤복과 당시 감독으로 나선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서윤복의 코치로 참여해 12위를 기록한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 세 사람의 드라마가 영화 속에서 펼쳐진다.
마라톤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은 오래 전 시작됐다. 강 감독은 “20대 때 1924년 파리올림픽 실화를 다룬 영화 ‘불의 전차’(1981)를 보고 달리기가 매력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했다”며 “극장에서 개봉하는 외화가 많지 않을 때라 비디오로 봤는데도 굉장히 설렜다”고 회고했다.
‘1947 보스톤’의 이야기는 단선적이지 않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뛴 두 사람의 아픈 역사가 바닥에 깔려있다. 광복 이후 처음으로 그 아픔을 극복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후배를 양성해 보스턴으로 향하는 이야기가 그 위에 쌓였다.
강 감독은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세 인물을 한 영화 안에서 들어다볼수 있는 구조다. 역사적 사실 자체가 영화하는 사람 입장에서 참 좋은 아이템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손기정이라는 잘 알려진 인물과 상대적으로 감춰져 있던 두 인물이 결합된, 의도적으로 짜기도 쉽지 않은 절묘한 이야기였다. 세 인물이 다 잘 모르는 인물이었다면 투자 받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요즘 관객들의 호응도가 떨어지는 역사물, 극장에서 흥행을 보장하기 어려운 스포츠 장르, 게다가 농구나 축구처럼 호흡이 빠르지 않은 종목인 마라톤을 다룬 이 영화에 강 감독은 처음부터 자신 있었을까.
그는 “마라톤은 표현하기에 따라 굉장히 지루하고 단조로울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시대극으로 관객들을 어떻게 모을 것인지, 1947년의 보스턴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가 현실적으로 큰 벽이었다”며 “드라마 내적으로는 세 인물의 이야기에 입체성이 있어야 했고, 표면적으로는 마라톤 장면을 잘 연출해 긴장과 재미를 극대화해야 했다”고 말했다.
보스턴 마라톤대회 장면은 호주 멜버른 인근에서 찍었다. 1940년대 보스턴 모습을 연출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해 헌팅팀이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최적의 촬영지를 찾았지만 제작진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2019년 9월 호주 남동부에서 발생한 산불은 이듬해 2월에야 진화됐다. 촬영은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2월에 진행됐다.
강 감독은 “다행히 바람의 방향이 우리를 도와 분진 없이 촬영할 수 있었다”며 “그 때 촬영을 미뤘다면 코로나19 때문에 영화 작업이 훨씬 더 늦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이기 때문에 캐스팅할 땐 실제 인물과의 일치율을 고려했다. 손기정 역에 하정우를 먼저 확정하고, 서윤복을 생각했을 때 떠오른 배우는 임시완이었다.
강 감독은 “드라마 ‘미생’,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등을 보면서 임시완에 대해 ‘괜찮은 배우다, 큰 배우가 되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보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서윤복 선생과 외형의 느낌이 비슷했다”며 “마라토너를 연기할 만한 신체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서윤복을 연기하는 임시완을 카메라에 담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강 감독은 “촬영 기간 내내 임시완의 촬영이 있는 날은 설렜다. 나뿐만 아니라 현장 스태프 모두가 좋아했다”며 “한 장면 한 장면 만들어갈 때마다 쾌감이 있었다. 잘 해낼 거라 예상은 했지만 기대치의 150%를 해냈다”고 극찬했다.
신인 배우같은 예민함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하정우의 모습은 예상과 달라 놀라움을 안겼다. 그는 “하정우는 작품을 많이 해서 현장에서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일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엄청난 집중 속에서 섬세하고 정확하게 연기했다”면서 “시나리오에 대해 끊임없이 의논하면서 함께 수정 작업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배성우가 연기한 남승룡, 김상호가 연기한 백남현은 영화의 진지한 분위기에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한다. 백남현은 보스턴 현지에서 국가대표팀의 재정보증인을 맡은 인물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면모를 가졌지만 따뜻한 정이 있는 캐릭터다. 실제 인물은 백남용이다.
강 감독은 “백남용은 성공한 사업가 집안 출신으로 까칠한 성격이었지만 적극적으로 한국 대표팀을 도왔다. 서윤복의 식단 등 세세한 부분까지 지원해 세계적인 기록을 세우는 데 실질적인 일조를 했다”며 “김상호를 캐스팅하는 데 제작진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예측대로 연기하지 않는 럭비공같은 배우라는 점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미국에 있는 백남용의 후손들에게 여러 경로로 연락을 취해봤지만 만나지 못했다. 초상권 등에 대해 동의를 받지 못해 영화에선 ‘백남현’이라는 이름을 썼고, 서윤복의 일지 등에 남아있는 내용을 바탕으로 인물을 표현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는 ‘국뽕’ 이슈를 맞닥뜨리곤 한다. 강 감독은 “이 소재를 선택한 이상 그런 이야기가 분명히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도, 촬영할 때도 감정이 과하지 않게 표현되도록 절제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얘기를 왜 굳이 지금 할까’ 궁금해 할 관객들에게 어떤 답을 할지 고민했다. 강 감독은 “사람들이 잘 몰랐던 승리의 역사 한 페이지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팬데믹 이후 어려움을 극복하고 있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했다”고 설명했다.
강 감독의 대표작 ‘쉬리’(1999), ‘태극기 휘날리며’(2004) 등이 개봉하던 시기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였다. 극장가가 침체에 빠진 지금 강 감독은 관객들의 평가를 받아야 한다. 20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1947 보스톤’은 누적 관객 수 450만명을 돌파해야 손익분기점을 넘긴다.
강 감독은 “과거엔 450만명이 그리 부담스런 숫자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오기가 어려운 시대다.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이 있다”며 “입장료가 올라 관객 수가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강력한 콘텐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영화를 통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를 물었다. 강 감독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살던 궁핍하고 혼란스러운 시절에 열정을 가지고 원대한 꿈에 도전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됐으면 한다”며 “세 인물 중 누구에게 자신을 투영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을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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