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증오의 정치 안 된다"... 김대중의 목숨 건 호소

장신기 2023. 9. 23.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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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12월 김대중의 3.1민주국국선언사건 항소심 최후진술에 담긴 '민주주의가 가야 할 길'

[장신기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김대중은 해방 이후인 1946년 10월부터 전두환 정권 때인 1982년 12월까지 크고 작은 여러 사건으로 6년여 동안 감옥생활을 했다. 이중 단일 사건으로 가장 긴 기간 동안 수감생활을 한 것은 유신정권 시절인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사건' 때다.

이때 김대중은 1976년 3월 8일부터 1978년 12월 27일까지 수감했다. 그다음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으로 인해 1980년 5월 17일부터 1982년 12월 23일까지 투옥된 것이다. 이렇게 6년여 동안의 김대중의 감옥생활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 다음으로 그의 정치적 수난을 상징한다.

김대중의 수감생활과 관련된 자료는 전체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적다. 물론 그의 옥중서신이 국내외에 출간될 정도로 큰 관심을 받았지만 그밖의 자료는 매우 적다. 사진도 불과 몇 장만 남아 있을 뿐이다. 독재정권은 재판을 할 때에도 언론의 취재 및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했고 극히 일부의 내용만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1민주구국선언사건과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관련 시청각 자료는 공개된 것이 거의 없다. 사건의 역사적 비중에 비해서 대중적 이해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시청각 자료의 빈곤과도 관련이 있다.

이 상황에서 최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1976년 12월 20일 김대중의 3.1 민주구국선언사건 항소심 최후진술 음성자료를 공개한 것은 큰 가치가 있다. 우선 김대중의 법정 진술 내용이 음성자료로 남아 있는 것은 이것이 유일하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크다. 또한 이 자료는 이 사건에 대한 연구와 문화콘텐츠 활용에 있어 유용한 가치가 있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 자료의 출처를 현재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전후 상황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미국이나 일본의 언론사에 소속된 외국인 기자가 방청석에 몰래 녹음기를 들고 가 김대중의 최후진술을 녹음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대중의 항소심 최후진술은 1시간 1분여 동안 진행됐다. 이중에서 가장 의미가 있는 내용은 '증오에 기반한 정치보복의 금지와 대통합의 정치 실현'을 강조한 것과 '비폭력 평화투쟁'을 강조한 대목이다. 이 두 가지에는 모두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 민주적 사회통합과 국가발전을 지향한 김대중의 철학과 의지가 반영돼 있다.
  
"복수와 증오의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 "복수-증오 정치 안 돼... 죽고 죽이는 전쟁하는 것 아니잖나" [76년 3.1사건 최후진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먼저 '정치보복 금지와 대통합의 정치 실현'과 관련된 부분을 먼저 살펴보자. 김대중은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코 현 정부에 대해서 어떤 보복심이나 복수심이나 증오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정부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와 협의를 하겠다면, 우리는 무엇이 이 나라를 위해서 애국하는 길이고 무엇이 이 민심을 수습하는 길이고 무엇이 정말로 올바른 안보의 길이냐에 대해서 정부와 언제든지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 의견도 말하고 그쪽 말도 서로 들을 용의가 있어요.

동시에 정부는 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우리 탄압하지 말고 또 권력이 바뀌더라도 정치 보복하지 말고. 우리는 서로 죽이고 죽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권을 주고받는 게임을 하고 있는 거니까. 이렇기 때문에 나는 정부에 대해서 우리가 민주주의 원칙 하에서 언제든지 대화하고 언제든지 협의하고 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은 이 원칙과 전략이 필요한 이유를 종교와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설명했다.

"내가 하느님께 맨날 맹세한 것은 어떠한 세상이 오더라도 우리는 정치보복을 금지하겠다는 것을 하느님께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우리 후손들이 나중에 이때를 볼 때 다 같이 민주주의 한다면서, 다 같이 공산당 반대한다고 하면서, 어째서 우리 할아버지들은 그 똑같은 원칙에 있으면서도 서로 얘기해서 문제를 다 해결 못하고 이렇게 가두고 합치고 이런 일들을 했느냐? 어째서 피비린내 나는 이런 이조 사색당쟁같은 이런 보복들을 했으냐? 못난 우리 조상들이다. 우리가 이조 말엽의 조선 같은 그런 또 저주와 비난을 우리 후손들로부터 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현 정국의 지도자들이 이때야말로 우리 민족의 자치 능력을 우리 민족이 서로 원칙이 같을 때는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는 능히 서로 평화적인 토론과 협의로서 해결해서, 해결해 나가는 슬기와 능력과 여유를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 우리 후손에게 보여주고 세계에 보이게 한다. 그래서 더 이상 남한 내에서 우리가 불필요한 정력 낭비는 안 해야 한다. 이런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화해통합형 과거사문제 해결과 국민통합을 다양한 관점에서 강조했다. 당시 수감 중이던 김대중은 자신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증오심을 갖고 있지 않으며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대중은 독재가 심화되던 1970년대부터 이와 같은 원칙을 내세웠고 이후에도 이를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김대중이 화해통합론을 제시한 이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김대중의 행동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오랜 기간 생명에 대한 위협, 연금, 투옥, 감시, 음해 등의 각종 탄압을 심하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과 측근 및 지인들도 김대중과 직간접적인 인연이 있다는 이유로 여러 탄압과 불이익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해자에 대한 증오와 보복심리를 품기 쉽다. 그런데 김대중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김대중의 화해통합형 과거사 해결 방안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가해자를 발본색원하는 것이 정당하고 정의에 부합하다는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엄격한 단죄와 단절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정서적으로도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의 주장은 대중적인 논리와 정서와 충돌하는 면이 있었다. 대중정치인 김대중으로서는 분명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면 김대중은 왜 그랬을까? 이를 네 가지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평화적인 민주화이행을 위한 전제조건인 최대연합을 이뤄내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중도층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대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봤고 이를 위해서 화해통합론이 필요하다고 봤다. 둘째, 한국 역사에서 극단적인 상호대립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셋째, 대통합의 정치가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호전적인 북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민주적 합의에 기반한 사회통합, 국민통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화해통합형 과거사 해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넷째,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국내, 남북한, 동북아지역 내의 뿌리깊은 적대의식의 해소가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여기에 화해통합형 과거사해결방안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김대중은 반북정서와 반일정서를 국내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은 최초의 정치가였으며 북한, 일본과 모두 관계 개선을 해서 가장 좋은 관계를 만들어낸 대통령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과거사문제 해법이 국내에 머물지 않고 한반도와 국제적 관점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비폭력 평화투쟁이 필요한 이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김대중은 이 최후진술에서 비폭력 평화투쟁을 강조했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화해통합론과 연결된 민주화투쟁 전략이었다.

"우리는 많은 사람이 감옥을 가야 합니다. 인도에서 간디가 반영 투쟁할 때 절대 폭력을 금지하면서 줄을 지어서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감옥을 인도 국민으로 채우자. 그러면 영국은 굴복 안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폭력을 하면 그건 영국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거다. 그 사람들이 무력으로 탄압할 절호의 구실을 주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폭력으로 가되, 투쟁을 해서 감옥으로 들어가자. 마틴 루터 킹이 미국서 흑인운동, 인권운동 할 때도 똑같은 일이었어요.

오늘날 우리도 3500만 국민의 1할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일부 35만. 35만 갈 것도 없고 천분의 일, 3만 5천. 이 천분의 일만 감옥 갈 각오한다고 같으면 우리는 이 정부를 반성시켜가지고 능히 우리의 목적을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국민이 위대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 못난 게 있기 때문에 이걸 겪고 있는 것입니다."
 
▲ '비폭력 평화투쟁'이 필요한 이유 [76년 3.1사건 최후진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김대중은 민주화운동의 전략으로 비폭력·비용공·비반미의 3비(非) 노선을 제시했었다. 이중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비폭력 평화투쟁이었다. 김대중은 유신 선포 직전인 1972년 8~9월께부터 비폭력 원칙을 강조했다.

당시 김대중은 독재를 강화하려는 박정희 정권과 저항 진영 사이에 극한적인 대립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고 그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비폭력 원칙을 강조한 것이다. 그만큼 비폭력은 민주화운동 방법론에 있어서 김대중에게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김대중이 비폭력 투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을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김대중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세력의 외연확장을 위해서 중도층이 동의할 수 있는 비폭력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또한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를 위해서도 비폭력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대중은 이를 인도 간디의 독립 투쟁과 미국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권 투쟁의 예를 통해서 설명한 것이다.

1980년대에 비용공과 비반미 원칙을 추가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김대중이 두 원칙을 추가한 것은 1980년 광주항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의 충격과 관련이 있다. 광주학살을 경험한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은 그 충격 속에서 극단화되고 급진화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김대중은 그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민주화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냉철한 분석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래서 비폭력투쟁을 제시한 것과 같은 논리로 비용공·비반미 원칙을 강조했던 것이다.
  
화해통합형 과거사해결 방안, 비폭력 투쟁의 역사적 의미
 
▲ "대선에서 540만이 민주주의 지지...내 생명을 바칠 수밖에 없다" [76년 3.1사건 최후진술]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이처럼 김대중이 화해통합론과 비폭력평화투쟁을 강조한 것은 한국이 처한 역사적·국제적 조건을 감안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를 통해서 극단주의의 발호를 막았고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이 가능케 했다. 특히 한국은 전쟁, 독재와 폭력의 역사가 오랜 기간 이어져서 극단주의가 발호하기 좋은 여건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김대중의 대통합의 정치는 더욱 의미가 있다.

김대중의 대통합의 정치는 미래지향적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비전과 의지의 산물이기도 했다. 김대중은 1979년 10.26 이후에 "우리는 링컨 대통령이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에 모든 정치적 보복을 금지하고 새로운 국가 목표로 국민들을 단합시킨 사례를 모델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볼 때 김대중의 화해통합론은 한국 현대사의 극단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역사적·정치적 고려가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의 대통합의 정치는 민주화운동시기에도 큰 역할을 했으며 대통령이 된 이후 국가적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대중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 화해·용서·관용의 대통합의 정치를 실천해 IMF구제금융사태로 인한 국가부도위기,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한국을 복지국가, 지식정보강국, 문화강국이 될 수 있도록 국정운영 리더십을 발휘했다. 

그래서 김대중의 대통합의 정치는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최근 한국 정치의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을 볼 때 이와 같은 김대중의 대통합의 정치는 현재에도 많은 의미를 준다. 그래서 이번에 공개한 3.1민주구국선언사건 항소심 최후진술 음성자료를 통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의미가 매우 크다.

* 김대중의 최후진술 전체 내용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클릭)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ECoxg4fUf7KVb6caaL4U-p
 
 교도소의 모습.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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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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