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눈물 나게 힘들 때…그는 '도피성 독서'로 단단해졌다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자기 몫의 밥벌이를 책임진다는 건 엄혹하고 녹록치가 않으며 고단한 일이다." 10년 차 기자인 저자는 지금껏 일하면서 수 없이 오열했다고 고백한다. 내면이 찢기고 자아가 소멸되는 것 같을 때, 존엄함의 영토가 침범당하는 것 같을 때, 감정을 억누르고 익살꾼을 연기해야 할 때, 누군가의 송곳 같은 말이 고정된 말풍선처럼 뒷통수에 달라붙어 꿈에까지 쳐들어올 때 심하게 흔들렸다. 그때마다 책 속 활자 사이로 도피했다. 허위와 가식에 환멸을 느낄 때 '인간실격' 요조의 포효를 생각했고, 일이 마음처럼 풀리지 않을 때 '김시종, 어긋남의 존재론'을 읽고 얄궃은 인생 속 낙관을 상기했다. 가성비가 떨어지는 '도피성 독서'였지만 이를 통해 단단, 명료, 단호한 '일하는 인간'으로 성장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 속에 '이렇게 하세요' 같은 정답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무의식의 어둠 속에서 '나만의 해답지'를 길어올릴 수 있었다고...마음을 지키며 앎과 삶의 일치를 추구하는 여정을 책에 담았다.
일하는 사람들은 일터에서 그렇게 스스로를 연소시키며 산다.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 순수하고 맑았던 얼굴에, 거짓과 위선의 가면, 허위와 기만의 육중하고 둔탁한 가면을 쓴다. 가면은 차갑고 무거워서 우리의 피부를 짓누른다. 어떤 사람은 가면을 하도 오래 써서 가면이 나인지 내가 가면인지 모르게 변해간다.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다. 요조는 그것이야말로 인간 ‘합격’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가면을 출근할 때 쓰고 퇴근할 때 벗지 못하면 인간 ‘불합격’, 인간 ‘실격’ 처리가 된다. - p.23
일하는 삶을 영화로 만들면, ‘하드보일드’* 장르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한참 일이 안 풀리고 힘들 때 그랬다). 세계는 비정하고 무정하다. 숭고한 가치도 어떤 선 의지도 왕창 무너져 내렸다. 모래알을 한 움큼 삼킨 듯 건조하고 텁텁하며 희망 없는 세계 속에 우리는 무표정하게 살아간다. 기계적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는, 유령 같은 사람들이 있다. 그 속에 잿빛이 된 얼굴의 나도 있다. 치정, 복수, 살인, 마약 같은 극적 요소는 없지만, 그저 지리멸렬하게 일상은 굴러갈 뿐이다. 허무와 퇴폐가 지배하는 세계다. 그러다 갑자기 사소한 악들을 연쇄적으로 맞딱뜨린다. 나는 속절없이 와르르 붕괴된다. - p.33
‘소설가들의 소설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카버는 많은 단편소설에서 미국 노동자계급의 모습을 생생히 묘사했다. 거기엔 한 줌의 낭만도 환상도 없다. 음울하고 고되고 지루하고 엄혹한 노동 속에서, 만만치 않은 세계가 주는 비참과 굴욕을 참아가며 사투하다가 무너지는 인간의 마음만이 있다. 그런 그는 십대 후반에 결혼했고, 항상 궁핍했다. 일찍 얻은 두 아이들의 양육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했다. 그 시기 시간을 쪼개 쓴 단편소설이 오늘날 미국 단편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것은 모든 소설에 그가 삶으로서 부딪히고 겪어낸 생생한 체험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리라.
그런 그가 쓴 소설이기에, 더 묵직하게 읽히는 이 소설을, 오늘 일터에서 비탄과 초라함을 느낀 당신에게 권하고 싶다. - p.40
내게 ‘독서’란 행위는 이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내 바다를 항해하면서, 내 고통을 돌보고 자정하는 시간과 같았다. 오늘은 산성비가 무섭게 쏟아져내렸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그 산성의 ph가 얼마였고, 섞인 원소가 무엇인지. 불순물의 양은 얼마나 됐고, 내 마음의 바다는 얼마나 제 농도를 잃었는지, 간혹은 현미경을 들고, 리트머스지를 대보며 검사를 해봐야 했다. - p.52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의 스토너를 그런 때 떠올린다. 질 가능성이 높거나 이기든 지든 그 전쟁의 상흔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도 불구하고. 일터에서 이 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싸워야만 한다고 생각될 때, 스토너의 인생 ‘싸움장면’을 보고 기를 모으게 된다. 평소에 소심하고 착한 사람이 성이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본때를 제대로 보여주는 주인공을 보면 묘하게 대리만족을 하게 된다. 모든 일에 어설프고, 소극적인 스토너지만 싸워야 할 때는 한치의 물러섬이 없다. 타협도 양보도 절대 하지 않는다. - p.77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 『관리의 죽음』을 읽다 보면 관계의 오해에서 오는 번민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 묘한 안도감이 든다. 그리고 처연해진다. 오해 자체가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 같아서. 그건 관계의 본질이고 불가항력적인 조건 같아서. 우리는 아무리 많이 맥주를 마시고 뒷풀이를 가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해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것 같아서. - p.87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이 망하면 통쾌한 마음’이란 용어는 독일어에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말로 “고소함” “쌤통”으로 쓰인다. 솔직하지만 내밀한 감정이어서 우린 흔히 쓰지 않지만 이렇게 명징하게 존재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나뿐만 아니라 다수가 이런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폭로한다. *『위로해주려는데 왜 자꾸 웃음이 나올까』를 쓴 티파니 와트 스미스는 쌤통의 감정은 꽤나 보편적이며, 특히 인간의 욕망이 발산되는 대중매체, 정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 p.115
한탸에게 일터는 그의 고유의 순정을 지켜주는 은신처이자 피난처 역할도 한다. 전쟁으로 금서들이 파괴되고, 무리를 지은 인간들이 협잡하고 공격하는 시대에 그가 일하는 지하작업장은 바깥 세계로부터 차단돼있다. 시끄러운 포격음도 사람들의 아귀다툼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침묵 속에서 폭력과 혐오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고요한 곳. 그는 그 곳에서 책을 읽고 교양을 쌓고 지식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순정’을 지켜나간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행복감을 경험한다. 일과의 일체감, 환희와 낭만을 느낀다. 길고 혹독한 노동 시간 중 실낱같은 희망을 주는 그만의 축제이자 환상적인 ‘제의’ 같은 시간이다. - p.180
‘책은 우리 내면의 얼음을 깨는 도끼’라는 말을 믿는다. 도끼를 하도 맞아서 풍화되고 침식되다 못해 포슬포슬한 모래 알갱이가 된 독자 한 명이 여기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도끼로 맞고, 자기 갱신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 과정을 통해 지켜야 하는 진지함과 엄정함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우리는 범속해지지 않은채, 정글 같은 일터에서 고유성과 개성을 지키면서 단독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과 같이 행간에 머물고, 책의 척추를 어루만지며 다시금 사유해 본다. 당신과 나, 우리가 지금 느끼는 어떤 고통에 가 닿길 바라며. - p.231
출근하는 책들 | 구채은 지음 | 파지트 | 232쪽 | 1만68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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