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걸린 우크라이나 국기를 보며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그단스크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입니다. 기차의 차창 밖으로 널찍한 평원이 펼쳐집니다. 중부 유럽의 탁 트인 경치를 즐기고 있자면, 긴 기차 여행도 그리 지루하지는 않았습니다.
항구 도시인 그단스크에 비해, 바르샤바는 내륙에 위치해 있습니다. 항구에 비해 교통이 원활하지는 않죠.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폴란드의 최대 도시는 바르샤바가 아니라 그단스크였습니다. 내륙의 중심지는 현재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크라코프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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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샤바 비스와 강변 |
| ⓒ Widerstand |
14세기 폴란드는 카지미에서 3세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하지만 카지미에시 3세는 남성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조카인 러요시 1세가 폴란드 왕위를 이어받았죠. 러요시 1세는 이미 헝가리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요시 1세가 폴란드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는 주변국을 침략하며 영토를 크게 확장하며, 그에 따라 비용 부담이 크게 발생했습니다. 원래부터 귀족의 힘이 강했던 폴란드에서는 멀리 떨어진 국왕의 세금 징수에 순순히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러요시 1세도 남성 후계가 없었습니다. 결국 러요시 1세는 자신의 두 딸에게 헝가리와 폴란드의 왕위를 물려주고, 대신 귀족들의 특권을 광범위하게 인정해 주었죠. 어린 나이에 죽은 장녀를 제외하고 차녀인 마리아가 헝가리의 왕이 되었고, 삼녀인 야드비가가 폴란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야드비가는 1386년 리투아니아를 다스리던 요가일라와 결혼합니다. 이 결혼을 통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한 명의 왕을 모시는 동군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1569년에는 두 나라가 통합을 결정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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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샤바 왕궁 |
| ⓒ Widerstand |
덕분에 폴란드는 국왕의 절대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다원적인 문화를 꾸리기도 했습니다. 폴란드는 유럽의 종교 전쟁에도 휘말리지 않고 관용적인 정책을 이어갔죠. 르네상스 시기에는 학문과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이 시기 폴란드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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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페르니쿠스의 동상 |
| ⓒ Widerstand |
결국 17세기 폴란드의 영토는 급격히 축소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코사크의 반란이 벌어졌습니다. 프로이센도 독립했죠. 중앙과 지방에서 반란이 빈발했습니다. 러시아는 동진하며 폴란드의 영토를 잠식했습니다.
18세 중엽부터 폴란드는 세 차례나 주변국에 의해 분할됩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의 영토를 가져간 것이죠. 1772년 1차 분할로 폴란드는 영토 30%를 상실했습니다. 1793년 2차 분할에서는 남은 영토와 인구의 절반을 빼앗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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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르샤바 성 광장 |
| ⓒ Widerstand |
1788년에는 의회에서 유럽 최초의 근대적 성문헌법인 '5월 3일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헌법 제정에 따라 농노제가 폐지되고 자유 계약에 따른 소작제가 마련되었죠. 농민들에게 거주 이전의 자유를 명시했습니다. 귀족이 농민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재판권도 폐지했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서두르는 조치들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에도 폴란드는 끝내 멸망했습니다. 사실 주변국이 폴란드 분할에 속도를 낸 것도, 폴란드의 이 같은 개혁 움직임을 경계했기 때문이었죠. 폴란드가 다시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전에 완전히 폴란드를 합병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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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16년 세워진 바르샤바 대학교 |
| ⓒ Widerstand |
다시 만들어진 국가도 위태로웠습니다.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9월 17일에는 독일과 은밀히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소련이 폴란드를 침공합니다. 폴란드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분할되었습니다.
서구 열강은 폴란드를 지원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큰 도움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침공이 2차대전이라는 거대한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 탓이었죠. 소위 '가짜 전쟁(phony war)'이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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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폴란드 대통령궁 |
| ⓒ Widerstand |
바르샤바는 냉전 갈등의 최전선이 되었습니다. 서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항해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하지만 폴란드인은 끝없이 저항했습니다. 1956년에는 식량 문제로 파업이 발생해 폴란드 공산당의 당 지도부가 교체되었습니다. 1970년에도 항구 노동자의 파업으로 제1서기가 퇴진했죠. 1980년에는 연대노조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이듬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탄압의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1989년 파업은 다시 벌어졌습니다. 결국 자유로운 선거가 치러졌죠.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부는 그렇게 무너졌습니다. 동유럽 공산주의 붕괴의 신호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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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대노조를 기념하는 벽 |
| ⓒ Widerstand |
유럽의 모두가 외면하는 사이, 폴란드는 몇 번이나 거대한 악과 맞서야 하는 전선에 내몰렸습니다. 때로 패배할 때도 있었죠. 그렇게 국토도 국민도 사라지는 듯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승리했고, 폴란드라는 국가를 지켜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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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리 퀴리 기념관에 걸린 폴란드 국기 |
| ⓒ Widerstand |
어찌 생각하면 폴란드라는 국가는 그 자체로 침탈의 역사를 극복해낸 상징이었습니다. 수없이 이어진 위기에서도 끝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승리해낸 역사의 증인이었습니다.
폴란드에 걸린 우크라이나의 국기를 보며, 오직 폴란드만이 지금의 국제 사회에 보낼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역사로 증명해낸 분단, 소멸, 그리고 극복의 메시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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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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